흑백사진 6장으로 복원한 100년 전 집 '딜쿠샤'

동아일보
동아일보2021-04-09 11:41:00
공유하기 닫기
서울 종로구 송월길의 고갯길을 10분 정도 오르자 붉은색 2층 벽돌집이 툭 튀어나온다. 주변의 잿빛 연립주택과 비교하면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 1층 거실에 들어서자 건물 벽과 같은 색의 벽돌로 만든 벽난로가 놓여 있다. 난로 위에는 중세 유럽풍의 은촛대와 은제 컵이 놓여 있다. 벽면에는 세 마리의 칼새가 그려진 방패 모양의 휘장이 걸렸다. 흡사 유럽 성에 온 것 같다.

분위기는 2층에서 바뀐다. 거실에는 연꽃과 오리, 새를 채색 자수로 장식한 2m 높이의 조선시대 전통 병풍이 놓여 있다. 동서양의 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곳은 미국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가 1923년에 지은 자택 ‘딜쿠샤’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구한말 부친을 따라 조선에 온 테일러는 1919년 3·1 독립선언서를 일제의 눈을 피해 세계에 알린 주인공이다. 이후에도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서울시는 1942년 일제에 의해 테일러가 추방된 후 방치된 딜쿠샤의 원형을 복원해 지난달 1일부터 일반에 공개했다.

딜쿠샤의 실내 복원을 전담한 최지혜 국민대 예술대 교수(49)는 국내에 드문 근대 서양 앤티크 양식 전문가다. 그는 “방문이 곧 훼손이라고 생각하지만 되레 사람의 손길에서 멀어지면 죽은 공간이 되기 쉽다”고 했다. 그는 2014년 덕수궁 석조전 실내 공간을 비롯해 미국 워싱턴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복원에도 참여했다. 최근에는 신간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혜화1117)을 펴내 딜쿠샤의 복원 과정을 세세히 담았다.
복원 시 핵심 단서는 테일러 부부가 남긴 흑백사진 6장이었다. 최 교수는 사진에 있는 물건을 하나하나 확대해 형태, 재질, 장식을 샅샅이 분석했다. 마치 사건을 해결하듯 제작 시기와 장소를 추적했다. 테일러의 부인 메리가 남긴 유고도 큰 도움이 됐다. 그는 “보통 실내는 사적인 공간이라 자료가 많지 않은데 사진 6장이면 해볼 만했다”며 “어려운 건 가구 복원이었다. 근대 가구는 박물관에 보존되기보다 버려지는 경우가 많아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벽난로를 비롯해 실내 물품의 약 70%는 해외에서 구입했고, 붙박이 의자 등 나머지는 국내에서 최대한 비슷하게 제작했다.

최 교수는 복원을 마친 실내 공간을 “마치 흑백이 컬러로, 평면이 입체로 되살아난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실내 복원의 매력에 눈뜬 건 우연이었다.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4학년 재학 시절 했던 번역 아르바이트가 계기가 됐다. 고(古)악기를 수입·판매하는 회사에서 일했는데, 사장이 영국을 들를 때마다 경매회사의 도록을 가져왔다. “미술품이나 가구가 경매로 거래된다는 걸 도록으로 처음 알게 됐는데 재밌는 거예요. 사장님이 제게 영국에 있는 미술전문 대학원 ‘소더비 인스티튜트(Sotheby‘s Institute)’에 보내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는 1994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2년 뒤 회사가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아 학비 지원이 힘들다는 연락이 왔다. 유학에 반대하는 가족에게 그는 “딱 한 학기 등록만 도와 달라”고 설득했고, 이후 전액 장학금을 받아 장식미술사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때 본 영국의 수많은 하우스 뮤지엄(박물관으로 만들어진 집)은 그에게 적지 않은 자극이 됐다. 귀국한 뒤 장식미술사를 다룬 ‘앤틱가구 이야기’(호미)를 2005년 발간했다. 이 책을 본 박물관 큐레이터의 제안으로 덕수궁 석조전 실내 공간 복원을 맡게 됐다.

그가 네 번째로 복원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건축물은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이다. 두 곳은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집무실로 쓰였다. 그는 “복원을 통해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