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은 화재에 대한 경각심을 되새기는 ‘소방의 날’ 이었습니다. 건조하고 추운 가을~겨울철은 화재에 취약한 계절이라 소방공무원들이 특히나 더 촉각을 곤두세우는 시기이기도 하죠.
최첨단 소화시설이 있는 현대에도 화마(火魔)는 무서운 상대인데, 수백 년 전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요. 목조 건물이라 불이 한 번 나면 피해가 컸기에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불이 더더욱 무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궁궐에서는 화재를 막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청동으로 용을 만들어 연못에 넣어두기까지 했다는데요. 실질적으로 화재에 대처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을까요? 국립고궁박물관 백은경 학예연구사에게 청동 용 조각에 얽힌 사연을 듣고 조선시대 소방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최첨단 소화시설이 있는 현대에도 화마(火魔)는 무서운 상대인데, 수백 년 전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요. 목조 건물이라 불이 한 번 나면 피해가 컸기에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불이 더더욱 무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궁궐에서는 화재를 막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청동으로 용을 만들어 연못에 넣어두기까지 했다는데요. 실질적으로 화재에 대처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을까요? 국립고궁박물관 백은경 학예연구사에게 청동 용 조각에 얽힌 사연을 듣고 조선시대 소방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용 조각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옛날 사람들에게 있어 용은 물의 신이었습니다. 연못이나 강, 바다 같은 물 속에 용이 살면서 비바람을 몰고 다닌다고 생각했지요. 특히 어민들에게 바다에 사는 용왕은 숭배 대상이었고, 농사에 필수인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치를 때도 용에게 비를 내려 달라며 기원했습니다.
불(火)과 정반대 개념인 물을 상징하는 용은 화재 예방을 기원하는 상징으로서 여기저기에 쓰였는데요. 경복궁 근정전 중수공사 때 발견된 용 문양 부적이 대표적입니다. 1000여 자의 작은 용(龍)자를 이용해서 커다란 하나의 물 수(水)자를 만든 부적입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있어 용은 물의 신이었습니다. 연못이나 강, 바다 같은 물 속에 용이 살면서 비바람을 몰고 다닌다고 생각했지요. 특히 어민들에게 바다에 사는 용왕은 숭배 대상이었고, 농사에 필수인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치를 때도 용에게 비를 내려 달라며 기원했습니다.
불(火)과 정반대 개념인 물을 상징하는 용은 화재 예방을 기원하는 상징으로서 여기저기에 쓰였는데요. 경복궁 근정전 중수공사 때 발견된 용 문양 부적이 대표적입니다. 1000여 자의 작은 용(龍)자를 이용해서 커다란 하나의 물 수(水)자를 만든 부적입니다.
이 용은 누가 만들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이 청동용은 1865년 8월 20일부터 9월 10일까지 20여 일에 걸쳐 한 쌍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당시 제작 총 감독은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 특정 업무를 총괄했던 별간역別看役 김재수金在洙였습니다.
청동 용은 반쪽씩 주조하여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2년 뒤인 1867년 7월 경회루 연못에 가라앉혔습니다. 1997년 발견 당시에는 아쉽게도 한 쌍 중에서 한 개의 청동용만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청동용은 1865년 8월 20일부터 9월 10일까지 20여 일에 걸쳐 한 쌍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당시 제작 총 감독은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 특정 업무를 총괄했던 별간역別看役 김재수金在洙였습니다.
청동 용은 반쪽씩 주조하여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2년 뒤인 1867년 7월 경회루 연못에 가라앉혔습니다. 1997년 발견 당시에는 아쉽게도 한 쌍 중에서 한 개의 청동용만이 발견되었습니다.
“도성 안에 금화(禁火)의 법을 담당하는 기관이 없어
백성들이 부주의로 화재를 일으키면
집이 타버려 재산이 탕진되오니
그들의 생명이 애석하옵니다.”
(조선왕조실록 1426년 2월 26일)
백성들이 부주의로 화재를 일으키면
집이 타버려 재산이 탕진되오니
그들의 생명이 애석하옵니다.”
(조선왕조실록 1426년 2월 26일)
청동으로 용 형상까지 만들며 화재 예방을 기원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무서운 화재를 겪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건물은 대부분 목재라서 한 번 불이 나면 피해가 어마무시했습니다. 특히 초가가 대부분이었던 일반 백성들의 집은 더더욱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종 8년인 1426년 2월에는 이틀간 큰 화재가 났는데, 이 때 2000가구 이상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 노비의 집에서 일어난 화재가 겨울철 거센 바람을 타고 번져서 민가와 관아들을 태운 것입니다.
이 사고로 32명이나 숨지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한양에 있던 집 1만 8000여 채 중 10분의 1가량이 타버린 큰 불이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왕실에서는 화재에 대비하기 위한 소방전담기구인 ‘금화도감’을 설립하게 됩니다.
조선시대 건물은 대부분 목재라서 한 번 불이 나면 피해가 어마무시했습니다. 특히 초가가 대부분이었던 일반 백성들의 집은 더더욱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종 8년인 1426년 2월에는 이틀간 큰 화재가 났는데, 이 때 2000가구 이상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 노비의 집에서 일어난 화재가 겨울철 거센 바람을 타고 번져서 민가와 관아들을 태운 것입니다.
이 사고로 32명이나 숨지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한양에 있던 집 1만 8000여 채 중 10분의 1가량이 타버린 큰 불이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왕실에서는 화재에 대비하기 위한 소방전담기구인 ‘금화도감’을 설립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