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안 읽는 친구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29STREET
29STREET2020-10-20 14: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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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GettyimagesBank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을 맞아서 책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사실 에디터 RAN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책 많이 읽는 사람만 책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동안 ‘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책 이야기는 평론가쯤이나 돼야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왔다. ‘내가 감히 책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책’이란 나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영역으로 여겨왔고, 그 사이 책은 일상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렇게 종이에 인쇄된 글자보다 영상에 뜨는 자막을 훨씬 더 많이 보다가 계절의 영향인지 문득 책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훅 들었다. 그래서 그동안 책을 여러 권 샀다. 그 중에는 첫 장만 읽고 손도 대지 않은 책도 있고, 의무감에 꾸역꾸역 책장만 넘긴 책도 있다. 반대로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은 책도 있는데, 바로 이 책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평론가도 뭣도 아니지만, 그냥 책을 읽고 느낀점에 대해 말하겠다는 거다.

책 안 읽는 에디터 RAN에게 책 읽는 재미를 알려 준 만큼, 이 책들이 책 안 읽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독서의 재미를 알려 주길 바라면서 3권의 책을 준비했다. 주관적인 평가를 통해 골랐지만, 이미 많은 독자들의 선택을 받은 책이니 서점 또는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한다면 큰 고민 없이 집어 들어도 괜찮을걸?


📚 <알로하, 나의 엄마들>
이금이 지음 / 소설 / 창비
알로하, 나의 엄마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을 떠나 하와이로 향한 세 여자가 있다. 아버지가 일본군과 싸우다 죽은 뒤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던 열여덟살 버들은 하와이에 가면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중매쟁이의 말에 사진만 보고 시집을 가는 일명 ‘사진 결혼’을 하기로 한다. 결혼한 지 석 달만에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된 홍주와 무당의 손녀라는 이유로 온갖 멸시를 받던 송화까지 세 사람은 그렇게 사진 한 장에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걸고 ‘사진 신부’가 되어 하와이로 떠난다. 하지만 사진 속 젊은 남편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고, 낙원이라던 하와이 생활은 조선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사진 한 장에 걸었던 그들의 꿈같은 기대는 허망한 현실로 다가 온다. 가족도 없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낯선 이국 땅에서 세 사람은 힘든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세 사람은 그곳에서 연대하며 의지하며 자신들의 삶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간다.』

‘버들’의 시선으로 쓰여진 이 책은 읽는 내내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이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하와이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살아가는 세 사람의 모습이 글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무엇이 그들을 머나먼 하와이 땅으로 떠나도록 했는지, 어떻게 그 낯선 곳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살 수 있었는지를 보고 있노라면 안쓰러우면서도 멋지다. 한 드라마 속 대사처럼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이들이 어떤 불행과 행복을 오가며 인생을 살아 내는지는 책에서 직접 만나보길.

📖책 속 한 구절
“돌이켜 보면 내는 내 시상 살라꼬 어무이, 동생들 다 버리고 이 먼데까지 왔으면서 딸은 내 곁에 잡아 둘라 카는 기 사나운 욕심인기라. 내는 여까지 오는 것만도 벅차게 왔다. 인자는 니가 꿈꾸는 시상 찾아가 내보다 멀리 훨훨 날아가그레이”

📚 <파과>
구병모 지음 / 소설 / 위즈덤하우스
파과.
『남들 눈엔 평범한 60대 노인이지만, 40여 년 간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살아온 여성 킬러 ‘조각‘. 열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집에서 쫓기듯 나와 이후 청부살인업에 뛰어든 ‘조각’은 이후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며 알아주던 킬러로 통했지만, 시간 앞에 장사 없듯 예전과 같지 않은 몸에 퇴물 취급을 받는다.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냉정한 킬러로 살아온 ‘조각’이지만, 노화로 인한 변화인지 타인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딸을 잃고 절망에 빠진 의뢰인을 보면서, 폐지를 줍는 노인의 손수레를 정리해주면서 연민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그. 그리고 임무 수행 중 부상을 입고 급히 찾은 병원에서 자신을 치료해 준 젊은 의사인 ‘강 박사’와의 만남 이후 ‘조각’의 변화는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조각’의 변화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동종업계(?)에 종사 중인 젊은 킬러 ‘투우’다. 그는 감상에 빠져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조각’이 신경에 거슬린다. ‘투우’는 ‘조각’의 일에 끼어들며 그를 점점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본 적 없는 캐릭터와 설정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책이다. ‘조각’은 어떻게 킬러가 됐는지, ‘조각’이 ‘강 박사’와 ‘투우’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투우’는 왜 ‘조각’에게 집착하는지 궁금해서 책장을 계속 넘기게 된다. <파과>는 흠집이 난 과일을 말하기도 하고,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라는 16세를 뜻하기도 하는데,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제목의 뜻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했다.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고 되뇌며 살아왔으나 지키고 싶은 것들이 생겨버린 환갑이 넘은 ‘조각’은 젊음이 흠집난 파과일까, 외면해 왔던 감정을 느끼며 인생의 빛나는 시절인 파과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 

📖책 속 한 구절
“사라진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때”

📚 <이제야 언니에게>
최진영 지음 / 소설 / 창비
이제야 언니에게.
『고등학생이던 ‘이제야’는 당숙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제야는 그날 이후 홀로 산부인과와 경찰서를 찾아가며 침착하게 대응하지만, 돌아온 건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2차 가해다. 피해자에게 피해자 답지 않다고 다그치며, 없던 일처럼 지내길 강요하는 사람들로부터 제야는 또 상처를 입는다. 착하고 얌전한 아이에서 그날 이후 ‘그런 일을 당할만 한 아이’가 되어버린 제야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피해 엄마의 오랜 친구인 강릉 이모에게로 쫓기듯 떠난다. 제야는 강릉에서 지내며 검정고시도 보고 대학에도 진학하지만, 그날은 제야에게 잊을 수 없는 날로 남아있다.』

앞서 소개한 책들을 재미와 감동을 기준으로 골랐다면, 이 책은 그냥 모두가 꼭 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골랐다.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내용이 무겁다고 해서 읽기 어려운 책은 아니다. 씁쓸한 현실이지만 이 책은 주위에서 흔하게 접하는, 우리의 삶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그런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언제 어디서 피해자가 될 지 모르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다. 

그동안 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성폭력 사건을 접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 그 일은 ‘나의 일’ 그리고 ‘우리의 일’이 됐다. 그리고 든 생각은 ‘나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피해자 다움을 강요하는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왜 나는 이런 일을 당했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책임의 화살을 가해자가 아닌 나에게 돌리며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은 후 알았다. 제야의 말처럼 잊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견디려 애쓰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고,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걸. 세상에 피해자 다운 모습 따윈 없다고. 

📖책 속 한 구절
"내가 그럴만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나를 몰아세웠어. 내가 겪은 사건만큼 나란 존재가 너무 끔찍했지. 끔찍한 나는 그런 일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잖아. 그 일 이전에는 나는 나를 끔찍해하지 않았어. 원인과 결과가 자꾸 역전되는 거야"

에디터 RAN lastleast@donga. 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