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만들어내는 색의 마술, 에브루(Ebru)

바이라인2020-09-10 12: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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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 전은지 기자] 자연이 만들어내는 여러 현상은 인간이 쉽게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고 경이로운 장면이 많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하늘의 모습이나 예고없이 뜨는 무지개, 계절에 따라 변하는 나뭇잎의 색깔과 같은 것들 말이다. 또는 작용과 반작용 원리나 진자운동을 이용한 작품처럼 과학이 미술과 결합되는 것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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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수업 시간에도 다양한 원리를 이용한 활동을 했었다. 그중에서도 크레파스와 수채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을 때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반발 원리 때문이다. 유지로 굳혀 만든 크레파스로 그린 부분에는 수채화 물감이 묻지 않아 하나의 그림에서 여러 가지 표현이 가능했다.

이런 물과 기름의 반발성을 이용해 터키에서는 ‘에브루(Ebru)’라는 전통예술을 만들어냈고, 2014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마블링(marbling)’ 기법을 이용해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에브루는 어떤 것일까.


터키에서 시작된 전통예술

에브루는 쉽게 말하면 ‘오일 마블링(Oil marbling)’이다. 13세기 중앙아시아에서 처음 등장해, 이란, 아나톨리아까지 전래됐다. 이후 아나톨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13세기 말 이후 형성된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 시절, 터키의 화가와 서예가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창안한 마블링 예술을 말한다.

EBS 다큐 유튜브 ‘세계테마기행 – 상상보다 멋진 터키 4부- 또 하나의 세계 카파도키아’ 캡쳐(https://youtu.be/k9bdmXvXSQo)
에브루에 사용되는 ‘마블링’은 미술 표현의 한 기법이다. 물 위에 유성 물감을 떨어뜨려 여러 도구로 모양을 만들거나 휘저은 다음, 종이나 천을 물 위에 덮어 물감을 묻힌다. ‘마블’은 대리석을 말하기도 해, ‘대리석 무늬 기법’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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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성질을 이용했기 때문에, 매번 같은 모양이 나오기 어렵고 작은 움직임에도 다른 모양이 나온다. 완성되기 전까지는 모양을 알 수 없는 섬세한 미술이다.

에브루는 교육적으로도 뛰어난 예술이다. 물과 기름의 반발성 원리도 알 수 있으며, 어떻게 물감을 뿌리고 떨어뜨리고, 휘젓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창의력 향상에도 좋아 미술교육에 활용되기도 한다.

에브루 제작 과정 / EBS 다큐 유튜브 ‘세계테마기행 – 상상보다 멋진 터키 4부- 또 하나의 세계 카파도키아’ 캡쳐(https://youtu.be/k9bdmXvXSQo)
에브루는 금속제로 된 큰 그릇 안에 기름 물을 담고 그 위에 여러 색상의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리거나 흩뿌리거나 붓질을 한 후, 무늬를 만든다. 그 다음 종이나 천을 덮어 그림을 옮긴다.

다양한 에브루 무늬 / 유네스코 홈페이지, 터키문화관광부 (https://ich.unesco.org/en/RL/ebru-turkish-art-of-marbling-00644), EBS 다큐 유튜브 ‘세계테마기행’ 캡쳐(https://youtu.be/k9bdmXvXSQo)
다양한 에브루 무늬 / 가립 아이 블로그(https://garipay.blogspot.com)
다양한 에브루 무늬 / 가립 아이 블로그(https://garipay.blogspot.com)
에브루는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매번 다른 무늬가 나오지만, 크게 꽃, 꽃잎, 장식무늬, 격자무늬, 모스크, 달, 물결무늬 등이 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따르면, 에브루에 사용되는 물감도 특이하다. 황소담즙이 들어간 물감을 사용하는데, 이 담즙은 천연 산 성분이 들어있어 물감이 흩뿌려지는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또한, 자연신화적인 방식으로 채취한 천연 안료를 사용하며, 밝은 초록, 빨강, 노랑 등을 사용한다고 한다.


예술 기법부터 철학까지 전수

에브루는 1인의 스승과 제자 관계 안에서 한 세대부터 다음 세대까지 전승된다. 이들은 에브루 안에 전통문화는 물론 정체성, 생활까지 모두 담겨있다고 여긴다. 그래서인지 에브루 예술가들은 연령, 성별, 인종이 다양하고, 사회 각계각층에 진출해있다.

작업을 위해 밑바탕을 직접 만들고 있다. 에브루는 도구 제작부터 작품 완성까지 예술가가 직접 만든다 / 가립 아이 공식 유튜브 영상 캡쳐(https://youtu.be/4dKy7HNU4vk)
그만큼 에브루는 전통을 담은 중요한 예술이기 때문에 사용되는 재료나 도구는 예술가 스스로가 제작해 준비한다고 한다. 또한, 기술 연마 외에도 에브루의 철학도 익혀야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제자는 스승의 작품을 관찰하고 모방하며, 작품 시작부터 완성까지 스승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훈련은 재료와 도구 확보부터 작품 제작까지 비공식적인 시연을 통해 진행되며, 기초 기술을 습득하기까지 최소 2년이 걸린다고 한다.

에브루 관련 클래스에 여성의 참여율이 높다고 한다 / 유네스코 공식 홈페이지, 터키 문화 관광부 (https://ich.unesco.org/en/RL/ebru-turkish-art-of-marbling-00644)
세심한 작업이 필요한만큼, 여성들의 참여가 많아졌다고 한다. 정부와 대학에서 에브루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무료 강좌나 워크숍을 개최하면서 여성이나 젊은이들이 참여하고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에브루 작업을 통해 여성들이 예술가로서 사회적 진출을 하게 되어 사회적 소속감은 물론, 민족 정체성이 강화되고,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도 확대되는 효과를 얻었다고 전해졌다.

에브루 아티스트 가립 아이 / 가립 아이 블로그(https://garipay.blogspot.com)
대중에게 잘 알려진 에브루 아티스트로는 가립 아이(Garip Ay)가 있다. 1984년 터키 시이르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회화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Diyarbakır Fine Arts High school을 거쳐, Mimar Sinan Fine Arts University에서 터키 전통 예술을 전공하며 에브루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에브루로 그린 모습 / 가립 아이 공식 유튜브 영상 캡쳐(https://youtu.be/4dKy7HNU4vk)
특히, 그는 전통기술과 현대의 변화 등 열린 개념에 초점을 맞춰 자신만의 에브루 작품을 탄생시켰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리메이크하면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블로그를 보면 전통적인 에브루 방식을 사용한 작품부터, 에브루 기법을 활용한 배경에 그림을 그린 작품까지 다양하다.

가립 아이의 에브루 작품들 / 가립 아이 공식 유튜브 영상 캡쳐(https://youtu.be/kivH74lfODA), 블로그(https://garipay.blogspot.com)
에브루 작업과 예술공연이 결합된 그의 무대 / 가립 아이 공식 유튜브 영상 캡쳐(https://youtu.be/c5jkZmOHUiw)
이후 가립 아이는 여러 워크샵과 세미나를 비롯해 전 세계 갤러리에 초대받았다. 그는 비디오 아트, 디지털 아트와 혼합된 새로운 형태의 에브루 예술을 펼치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에브루를 알리고 있다.

2017년 가립 아이가 참여한 광고 / SK이노베이션 제공
그는 지난 2017년 SK이노베이션과 광고를 촬영하기도 했다. 가립 아이는 2박 4일동안 작업하며, SK이노베이션의 혁신이라는 이미지를 에브루 기법으로 표현해 냈다. 당시 페이스북을 통해 진행된 그의 에브루 시연회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예술에 대한 신비로움과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작품부터 스카프까지 실생활에서 활용

에브루 기법을 활용한 제품을 우리나라에서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은 실생활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대리석이다.

실생활에서 에브루와 비슷한 무늬를 볼 수 있는 것은 대리석 무늬다. 인테리어로 많이 이용된다 / pixabay
유리구슬에서도 에브루와 비슷한 무늬를 볼 수 있다 / pixabay
대리석은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집 인테리어 전반에서 사용된다. 대리석의 모양과 물감을 떨어뜨렸을 때의 에브루 기법이 꽤 닮아있다. 다른 사례는 옛날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유리구슬이다. 구슬 속 모양이 에브루의 모양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EBS 다큐 유튜브 ‘세계테마기행 – 상상보다 멋진 터키 4부- 또 하나의 세계 카파도키아’ 캡쳐(https://youtu.be/k9bdmXvXSQo), pixabay
터키 현지에서는 에브루를 종이에 전사해 작품으로 판매하는 것은 물론, 천에 입혀 스카프나 넥타이 등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잡화로 만들기도 한다.

에브루 원데이클래스에서 체험해볼 수 있다 / 터키이스탄불문화원 홈페이지(http://tulip.or.kr/)
에브루를 실제로 체험해볼 수 있는 원데이클래스도 있다. 강남에 위치한 터키이스탄불문화원에서는 ‘수면 위의 예술_EBRU’라는 이름으로 매달 원데이클래스를 진행하고 있다. 종이와 실크 에브루 클래스로 나뉜다. 실크 100% 소재의 섬유에 패턴을 입혀 스카프로 만들어 개인 소장이 가능하다. 터키인 강사와 함께 A3 크기의 철판에서 1~2개의 패턴을 종이에 연습한 후 직접 컬러와 무늬를 만들어 실크에 입힌다.

종이도 마찬가지다. 2시간 동안 철판에서 기초 패턴 기법을 익힌 뒤, 종이로 작업을 옮겨가며 4개 정도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원데이 클래스 후 흥미가 생긴 이들은 정규반 강좌를 들어볼 수도 있다.

마블링 물감을 사용해 집에서도 체험할 수 있다 / pixabay
집에서도 쉽게 할 수 있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마블링 물감을 구매해 플라스틱 그릇에 물을 담은 후 물감을 떨어뜨려, 입으로 불거나 붓이나 막대 등으로 모양을 만들어주고 도화지를 물 위에 덮어 물감을 흡수시켜 주면 된다.

일반 물감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물에 뜨는 성질이 있는 유화 물감이나 매니큐어를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화는 마르기까지 오래 걸리며, 매니큐어는 냄새가 심하기 때문에 되도록 마블링 물감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실생활 속의 원리가 미술 작품이 되는 경우는 흔히 봐왔지만, 에브루처럼 역사와 전통이 오래 이어진 예술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충격이다. 그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고 그대로 물 위에 재현되는 것도, 종이에 그대로 표현되는 것도 멋지다. 터키인들이 오랜 시간 발전시키고 이어오면서 지켜온 에브루는 그 자체로서 값을 매기기 어려운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