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하는 ‘반값 면도기’..."면도기 업계의 넷플릭스 될 것"

동아일보
동아일보2020-04-03 17: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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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기 스타트업 ‘와이즐리’ 김동욱 대표가 이달 1일 선보인 면도기 신제품을 들고 있다. 미국 디자이너, 독일 엔지니어와 공동 개발했다.
소비자의 가격 부담이 작지 않았던 면도기 시장을 바꾸겠다며 면도기 제조에 뛰어든 청년이 있다. 가로 4cm, 세로 1cm짜리 면도날에 인생을 건 그 청년은 ‘반값 면도기’를 정기 배송하면서 면도기 구독 시대를 열었다.

면도기 스타트업 ‘와이즐리’ 김동욱 대표(31)는 2017년 친동생, 전 직장 동료와 공동으로 창업했다. 2018년 1월 첫 면도기 출시 이후 지금까지 모든 제품은 오직 자사 홈페이지에서만 팔고 있다. 유통비 등을 줄인 덕분에 가격은 타사 면도기의 절반 수준이다. 고객이 선택한 주기에 맞춰 면도날(4개 8900원)을 무료로 정기 배송하는 구독 서비스를 도입했다. 자체 브랜드를 내건 면도날 정기 배송은 와이즐리가 국내 최초다.
지인들은 ‘누가 스타트업이 만든 면도기를 사겠냐’고 우려했지만 비싼 면도기 가격이 불만이던 고객들은 선뜻 지갑을 열었다. 덕분에 출시 2년 만에 와이즐리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6%로 올라섰다. 20대에서는 무려 10%에 달한다.

김 대표는 원래 취업이 목표였다. 대학 졸업 전 한국P&G에 입사했지만 ‘과연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어 1년 만에 사표를 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 사업을 하는 게 진짜 원하는 삶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후 유아복 사업에 도전했지만 준비 부족으로 금방 실패했다. 백수가 된 김 대표는 당시 막 자취를 시작했고, 그동안 부모님이 사줬던 면도날을 처음 직접 구입했다. 이때 경험이 면도기 창업의 불씨가 됐다. “면도날이 터무니없이 비쌌어요.”

전 직장 동료들에게 묻고 해외 자료를 뒤지며 면도날이 비싼 원인을 찾았다. 그가 자체적으로 내린 결론은 글로벌 기업들의 오랜 독과점이었다. 세계 면도기 제조공장 상당수는 이미 망했거나 글로벌 기업들이 인수한 상태였고, 특허 장벽도 높았다고 그는 분석했다. “새로운 경쟁자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다 보니 유명 면도기 브랜드의 영업이익률은 애플보다 높은 30%에 달했던 거죠.”

그때 ‘면도기 시장을 바꿔 보자’는 결심이 섰지만 실력부터 쌓기 위해 컨설팅 회사 ‘베인앤컴퍼니’에 입사했다. 2년 반 뒤 두 번째 사표를 내고 본격적으로 창업에 매달렸다. ‘고객의 현명한 소비를 돕겠다’는 뜻을 담아 사명을 와이즐리(wisely)로 지었다. 면도날은 100년 역사를 가진 독일의 전문 제조업체에서 공급받았지만 면도기는 직접 만들어야 했다.

인력과 자금 모두 빠듯했지만 고객 반응을 듣는 데에는 아낌없이 투자했다. 출시 전 모집한 체험단 4000여 명에게 사용 후기와 개선점을 세세히 물었다. 실제 면도 습관을 관찰하려고 고객 집까지 찾아갔다. 고객들의 사소한 불편함까지 찾아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와이즐리는 타사 면도기들이 선반 위에 올려두면 자주 떨어진다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면도기 손잡이 위쪽을 평평하게 디자인했다.

김 대표가 창업 후 지금까지 직접 만나 인터뷰한 고객만 약 400명에 달한다. 직원 30명 중 4명은 오로지 고객 불만과 의견을 듣는 업무만 맡고 있다. 이렇게 모은 고객 의견이 와이즐리 경쟁력의 원천이다.

그는 면도기 업계의 ‘넷플릭스’를 꿈꾸고 있다. 월정액으로 원하는 영상을 마음껏 볼 수 있는 넷플릭스가 콘텐츠 시장을 혁신한 것처럼 면도기 시장의 독과점을 깨고 면도기 사용 습관까지 건강하게 바꾸겠다는 포부다.

그는 제품과 서비스를 일정 기간 사용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는 이런 ‘구독경제’가 미래 경제 생태계의 중요한 축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구독경제는 ‘소유’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요즘 소비 트렌드에 부합해 더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김 대표는 “매일 쓰는 생필품 시장에서 구독 서비스를 도입하면 수많은 소비자가 먼저 확보돼 있기 때문에 혁신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며 “앞으로 스킨케어 제품 등 생필품 부문으로 영토를 넓힐 것”이라고 말했다.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