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작가가 된 카이스트 수석 졸업생 "이건 네 인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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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STREET2020-03-13 16: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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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에 입학하고 꿈을 이룬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잃은 것 같았어요
좋은 대학교에 가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많은 입시생이 꿈꾸는 명문대, 그중에서도 수석졸업. 그야말로 탄탄대로가 펼쳐질 거라 모두가 예상했다. 하지만 박성호 씨의 선택은 달랐다. 높은 연봉과 안정성이 보장된 미래를 준비하는 대신 여행 작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출처 촬영 권혁성PD hskwon@donga.com

Q 학창시절 생활은 어땠나요?
A
“저는 강남구 대치동에서 자랐어요. 동네 친구들이 다 그렇듯이 학원을 굉장히 많이 다녔죠. 피아노, 바둑, 태권도, 플룻도 했었고. 중학생 때는 수학만 학원 두 개에 과외까지 따로 받았어요. 보통 밤 열두 시가 넘어서 집에 가고 시험기간에는 새벽에 학원에서 공부하다가 학교에 갔어요. 공부를 좋아했던 건 아니고요. 당연히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죠.”

마침내 목표로 하던 대학교에 입학했다. 앞으로도 열심히 공부만 하면 행복한 미래가 펼쳐질 줄 알았는데, 대학교 2학년이 되던 2011년. 학교 친구 네 명이 연달아 목숨을 끊었다. 공부를 잘하던 친구들이었다. ‘맹목적인 공부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는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군대를 제대한 스물네 살, 단돈 80만 원을 들고 호주로 떠났다.

사진=박성호
사진=박성호
사진=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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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 컨테이너에서 100일 동안 살면서 바나나 농장 일을 했어요. 원래는 1년 동안 호주에만 있을 생각이었는데 뉴질랜드에 잠깐 다녀오고 생각이 바뀌었죠. 비행기로 세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나라인데 풍경은 정말 다른 거예요. 한국인이 1년이라는 시간을 여행에 쓴다는 게 엄청난 특혜고, 기회가 될 수 있잖아요. 더 넓은 세상을 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세계 일주를 시작했어요.”

1년의 세계 여행을 마치고 박 씨는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나만의 행복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일상은 다시금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 같아요. 우리는 어딘가에 소속되는 게 익숙하잖아요.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려니까 굉장히 불안했어요. 적성보다는 안정적인 직장을 찾게 됐죠. 치의학전문대학교나 치의학 편입 포트폴리오를 다 만들어놨었는데 시험이 딱 한 달 남았을 때 취소했어요. 입학하면 7년 이상을 공부해야 하는데 적성에 맞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요. 대학교 졸업하고 1년은 백수로 살았어요. 취직도, 대학원 준비도 안 하고요. 집에서 쫓겨날 뻔했죠.”

우리는 가장 힘들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고는 한다. 진로 고민으로 한참 골머리를 앓던 박 씨도 여행에서의 기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고 말한다. 그에게 세계 일주는 대학생 때 겪었던 일 정도로만 추억하기엔 아쉬울 만큼 값진 경험이었다. 잊지 못할 결과물을 만들어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강연이다.

출처 촬영 권혁성PD hskwon@donga.com

Q. 책은 어떻게 쓰게 되신 건가요?
A
“후배들한테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마지막으로 여행 생각을 끝내고 싶었는데 강연을 안 시켜주는 거예요. 학부생이 세계 일주를 주제로 대강당에서 강연하는 건 전례가 없었거든요. 여기저기 도와달라는 메일을 돌렸더니 교직원 한 분이 대강당을 빌려줄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디자인을 전공했잖아요. 사비로 팸플릿, 포스터를 500개씩 만들어서 친구들한테 대전에 돌리라고 부탁했어요. 저는 신문사, 방송국에 ‘카이스트에서 세계 일주로 강연하니까 취재를 와 달라’라고 제보했고요. 청중이 200명 정도 왔어요. 대전 KBS에서 취재도 오고요. 방송을 보고 중앙일보, SBS에서 섭외가 들어왔고, 출판사들이 연락한 거죠. 제가 유종의 미로 생각했던 강연 덕에 여행 작가로 살게 됐어요.”

Q. 진로는 아예 변경하신 건가요?
A
“‘여행 작가가 됐으니까 디자인은 그만둔 거네’ 이런 얘기를 굉장히 많이 듣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산업디자인 타이틀만 없을 뿐이지 그때 공부했던 걸 그대로 적용하고 있거든요. 디자인은 제품에 환상을 심어주는 역할이에요. 실제 성능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은 제품 이미지에 환상을 갖고 사용하면서 자신감을 얻기도 하잖아요. 여행 작가도 똑같아요. 여행을 하다 보면 모든 부분이 환상적이지는 않아요. 여행 작가가 실제만 전달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기자가 아니잖아요. 여행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고 여행을 가고 싶게 만드는 게 우리의 일이죠. 제품 디자이너가 사람들의 니즈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면 여행 작가는 사람들이 어떤 여행을 하고 싶어 하는지 파악하는 거예요. 이제 비슷해 보이나요?”

그의 이야기가 미디어를 타고 나간 덕에 출판의 기회는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책을 쓰는 그 자체였다. 가난한 여행 생활을 하며 겪었던 일들을 한국에 돌아와 편안한 방에서 쓰려고 하니 잘 써질 리 없었다. 여행과 현실의 괴리감을 줄이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찜질방 생활이었다. 제일 북쪽 파주부터 제일 남쪽 제주까지 내려가면서 한 달간 찜질방 생활을 했다. 여행하는 느낌이 나니 한결 글쓰기가 편해졌다.

Q. 여행 작가의 수입은 어떤가요?
A
“구체적인 액수를 이야기하는 건 무의미할 것 같아요. 모든 프리랜서가 마찬가지지만 수입이 고정적이지 않잖아요. 어떻게 하면 수입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스스로 고민이 필요하죠. 여행 작가가 책으로만 돈을 버는 건 아니에요. 인세만으로는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거든요. 본인이 갖춘 능력과 여행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돈이 들어올 상황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같은 경우에는 강연과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어요. 앞으로의 상황을 봤을 때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 세대가 사회의 주류가 될 테니 여행이라는 분야가 점점 더 커질 거라고 생각해요.”
사진=박성호
사진=박성호
사진=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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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위험한 여행지에서는 죽을 뻔한 위기도 겪으셨는데요. 여행이 무섭거나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안 하시나요?
A
“아무래도 아프리카에서 택시 강도한테 납치당했을 때가 가장 위험했죠. 그런데 그것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그만두는 건 너무 슬프잖아요. 다만 그 때 무모하게 행동했던 게 후회가 돼요. 너무 저만 생각했고요. 제가 위험해지면 저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한테도 민폐가 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제 여행을 할 때는 경험보다는 안전을 우선시해요. 밤 6시 이후에 안 돌아다니고 으슥한 골목에 가지 않고 그런 것만 잘 지켜도 범죄에 처할 확률이 확실히 줄어들죠. 하지 말라는 거 하지 않고, 가지 말라는 곳에 가지 않아도 세상에는 할 만한 것과 갈 만한 곳이 정말 많아요.”

박 씨는 2019년 한 해 동안 두 번째 세계여행을 다녀왔다. 첫 번째 여행과는 확실히 달랐다. 자극은 무뎌졌고 두려움도 사라졌다. 대신 여유가 생겼다. 모든 게 영화 같았던 아프리카가 이제는 옆 동네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권태기가 찾아왔다.

“1년 동안 여행을 하는데 한 곳에서 3박 이상을 하지 않고 계속 돌아다녀요. 그러면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겠어요. 그 경험을 받아들일 그릇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경험은 많이 하는데 알고 있는 게 너무 적은 거죠. 공부해야겠다 싶어서 산 속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어요. 직접 걸어 다니면서 조지아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집을 찾았죠. 6월부터 9월까지 그 집에 들어가서 인터넷을 끊고 100권이 넘는 책을 읽었어요. 혼자 쓰는 집이라 말할 사람도 없고 외로움의 극한까지 갔어요. 석 달 동안 아무도 없이 책 읽고, 글 쓰고, 생각만 했어요. 나중에는 외로움 때문에 미치도록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또 저를 엄청나게 성장시킨 것 같아서 너무 좋았어요.”

출처 촬영 권혁성PD hskwon@donga.com
Q. 일각에서는 ’외국에 가야 꿈을 찾을 수 있냐‘ 하고 비판을 하기도 하는데요.
A
“외국에 가야만 꿈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죠. 굉장히 오만한 말이고요. 그런데 여행으로 꿈이 다채로워질 수 있다는 건 맞는 말인 것 같아요. 누구도 의심할 것 없이 글로벌한 시대잖아요. 여러 문화를 경험하는 건 생각의 틀을 깨도록 도와줘요.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에 그런 말이 있어요. 새로운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곳에 가야 하고, 큰 생각을 하고 싶다면 큰 장소에 가야 한다!”

Q.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세요?
A
“한국에 들어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경계하는 건 있어요. 저 스스로 여행 작가라는 틀에 갇히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글 쓰고 여행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여행 작가라는 직업을 하기는 할 건데 다만 이 직업 하나만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거든요. 요즘에는 능력이나 지식만 있으면 여러 일을 해도 상관없는 사회가 되고 있잖아요. 그때그때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다양한 직업을 갖고 싶어요.”

Q. 현재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을 위해 한마디 한다면?
A
“너무 어려운 질문이네요. 저도 그랬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이 있잖아요. 그걸 깨는 게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나만의 문제면 상관이 없는데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기대라든지 깨기 어려운 것들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그 현실을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사는 건 억울한 일이에요. 결국에는 모든 인생이 다 한 번이고, 특히나 젊음은 정말 짧게 주어지는 거니까 그 시간은 최대한 내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성소율 동아닷컴 인턴 기자 dlab@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