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두루미, 그리고 워터젤리 리뷰

sodamasism 2019-03-01 11:20
인파가 드문 거리를 혼자 걷는다. 마트에 들리지도, 편의점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극진히 대접받을 귀한 음료뿐이다. 사무실에서 미리 기다리던 후배는 반갑게 나를 맞아준다. “당신은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음료 신상털…”

오늘은 음료 한 잔 마시러 온 손님이라고.
워터와 젤리라니 최고다
(무슨 일로 세븐일레븐에서 괜찮은 음료가)
와. 간만에 세븐일레븐이 한 건 했다. 기묘한 음료만 만드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아니다. 마시즘이 마시는 것 다음으로 좋아하는 ‘젤리’다. 그것을 음료로 만들었다. 그것도 복숭아와 청포도 맛이라니. 보기만 해도 행복하다. 최고의 음료야. 정말 귀한 것을 가져왔구나.

심지어 6칼로리라고 적혀있다. 60칼로리였어도 마실 수 있는 맛일 텐데. 건강까지 생각하다니. 내가 알던 세븐일레븐이 아니다. 다만 걱정은 복숭아를 마실까 청포도를 마실까라는 고민뿐이다. 그런데 2+1이어서 복숭아맛이 한 병 더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청포도(를 마시고 복숭아)다! 오늘은 마음 편히 음료를 즐길 수 있겠군.
???
(무중력이 아닙니다)
나는 뚜껑을 따고 뒷목을 제쳐 한 번에 마시려고 했다. 아주 잠깐의 워터젤리가 들어왔다. 그리고 끝이었다. 이 녀석은 병 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야 안 나와. 병을 물고 숨을 크게 들이켜봤다. 하지만 내 가여운 폐활량으로 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금씩 나오던 음료도 멈췄다. 병을 거꾸로 뒤집어봤다. 워터젤리는 병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이게 무슨 무중력도 아니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아까 조금 나온 워터젤리를 마셨는데 확실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이더라고. 기필코 네 녀석을 마시고 말겠다.
도구를 써보자
(컵이 있는데 왜 담기지 못하니)
하지만 나는 여우도, 두루미도 아닌 인간이다. 도구를 쓸 줄 아는 인간. 폐활량이라는 육체적 한계 따위 컵으로 해결해주마. 자 컵을 두고 뒤집으면… 당연히 나오지 않았다. 페트병에 힘을 줘봤지만 쪼그라드는 것은 내 손이었다. 이것은 개미도 못 죽이는 내 체력의 문제가 아니다. 페트병을 왜 이렇게 단단하게 만든 거야.

그렇다. 병을 자세히 보니 입구로 향하는 모양이 완벽한 아치를 이루고 있었다. 병 기둥은 꿀벌들의 지혜를 닮아

육각형으로 이뤄져 있었다. 자연이 가르쳐준 가장 튼튼한 모양으로 병을 만든 것이다. 가우디나 노먼 포스터, 유현준 같은 유명 건축가도 혀를 내두르겠는걸? 문제는 이것이 찌그러져야 하는 페트병이라는 것이다.
빨대를 쓰자
병을 파괴할 수 없다면, 빨대를 쓰면 된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빨대를 찾으면 울고 있는 거북이와 환경파괴가 생각나서 최대한 쓰지 않고 있다. 잠깐 사무실에는 계속 쓸 수 있는 빨대가 있었다. 이거라면 죄책감 없이 음료를 마실 수 있다. 바로 캐비닛으로 향했다.
(이거 마시면…뭐)
가진 빨대가 일단 이거뿐이었다. 빙그레 마이스트로우 하트 모양 빨대. 누구도 이걸 써볼 생각을 못했다. 젠장 음료도 두 개고 빨대도 두 개인데. 눈물만 나는 거냐!
형 그냥 저는 마실게요
(헐크를 보는 아이언맨의 기분이 이럴까)
하지만 방법은 존재한다. 힘을 키우는 것이다. 운동을 열심히 하다 보면 이 음료를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단단한 페트병을 파괴할만한 초인적인 힘. 아니나 다를까 후배는 체면을 무시하고 양손으로 워터젤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마른오징어에서도 물을 짤 기세.

아까 병에 그려진 6칼로리는 사실 이걸 마시려면 6칼로리가 빠질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닐까? 후배의 끄응거림과 페트병이 조금씩 파괴되는 소리가 하모니를 이룬다. 이 폭력적인 광경에 나는 과거를 돌이켜 보게 된다. 이거 무력시위 아니야? 내가 뭐 잘못한 일은 없었겠지.

한껏 힘을 쓴 후배는 워터젤리를 마신다. 나도 리뷰하고 싶은데. 무서워서 내 것도 짜주라는 말은 못 하겠다.
언젠가 마셔주겠다
그나마 이 음료가 미덕인 것은 페트병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마실 수 있다. 나는 뚜껑을 닫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청포도 워터젤리 말고, 복숭아 워터젤리도 받아왔다. 정말 맛있을 거다. 고로쇠 수액을 받아먹듯 조금만 맛봤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세븐일레븐이 이번에도 해냈다. 예전에는 맛으로 날 농락하더니, 이제는 맛도 못 보게 나를 농락해? 기다려라 세븐일레븐. 더욱 힘을 키워 언젠가는 워터젤리를 마셔줄 테니.

- 덧 : 띵동! 해답이 왔습니다
리뷰가 올라온 뒤에 해답이 왔다. “세게 흔들어서 드세요” 한줄의 문구에 충격을 받았다. 언제나 탄산음료만 마시는 나에게 음료를 흔든다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었다. 나는 병의 뚜껑을 닫고(이런 용도였다) 음료를 마구 흔들었다. 난공불락이었던 젤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땅의 여우와 두루미들이여. 못 마시는 것은 흔드는 것이었다. 워터젤리녀석! 인간의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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