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180cm 훈남”…日 ‘애인 대행’ 서비스 체험해보니…

celsetta@donga.com 2018-01-22 17:43
사진=패밀리 로망스 공식 홈페이지
“내일 약속장소에 나갈 분입니다. 키 180cm가 넘는 ‘훈남’입니다.”

지난해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일본의 한 ‘인간관계’ 대행 서비스 업체에서 날아온 메일에는 이 같은 글 한 줄과 함께 한 일본인 남성의 사진이 있었다. 얼마 전 일본 여행 계획을 세우며 크리스마스 당일 오후 도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남자친구’ 대행 서비스를 신청했다. 전날 도교에 도착, 호기심과 설렘을 느끼며 도쿄의 한 숙소에서 잠을 청했다.

◆ “인간관계, 뭐든 대신해 드립니다”…일본의 대행업체 ‘패밀리 로망스’


일본 도쿄 신주쿠구에 있는 업체 ‘패밀리 로망스’는 가족·연인·친구 등 다양한 인간관계를 ‘빌려’주는 곳이다. 결혼식 참석·가족·연인 대행 서비스는 기존에도 있었지만, 이 업체는 한 수 더 떴다. 다양한 상황을 설정해 맞춤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소셜미디어에서 ‘잘 나가는’ 사람 만들어 주기 ▲결혼식·장례·성묘 참석 ▲연인 ▲가족 ▲친구▲미팅에서 분위기를 띄워주는 친구 ▲같이 놀이공원에 놀러가 주는 친구 ▲같이 노래방에 가 주는 노래 잘하는 친구 ▲강연회·세미나 참석 ▲무대 관객 ▲음식점 고객 ▲푸념 들어주기 ▲대신 남에게 사과해 주기 ▲방 청소·짐 정리 등이다.

2009년 생긴 이 업체는 한 달에 약 2~30건 의뢰를 받고 있다고 한다. NHK, TV 도쿄 등 다양한 TV 프로그램에서 소개하며 화제가 됐다.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의 연령대와 유형은 다양하다. 이용 목적도 그렇다. 관계를 맺는데 드는 노력은 귀찮지만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 또 어떤 때는 “나 이만큼 친구가 많은, ‘잘 나가는’ 사람이야” “내 애인이 이렇게 예쁘고 잘 생겼어” 자랑하고 싶기도 하다.

◆ “어떤 ‘남자친구’가 나올까? 호기심 반, 설렘 반”

업체의 많은 서비스 중 남자친구 대행 서비스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해당 업체에 신청을 마치자 답장이 왔다. 원하는 상대방 남성의 외모·성격·나이를 설정할 수 있다는 내용과 함께 간단한 안내가 있었다. 약속 장소·데이트 코스는 직접 짜서 업체에 보낼 것. ‘남자친구’를 연기하는 스태프와 밀실, 노래방, 그 밖에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공간에는 들어가지 말 것. 스킨십은 손잡기, 팔짱, 가벼운 포옹 정도까지 가능하다는 거였다. 기본 이용 시간은 3시간, 이용 요금은 1만5000엔(약 15만 원)이며 한 시간 연장마다 5만 원이 더 든다. 이용을 모두 끝내고 계산하면 된다. 업체에서 요구한 내용을 써서 보내자 메일로 남성의 사진이 왔다.

25일 당일 낮 1시, 약속장소인 도쿄 신주쿠역 근처 카페로 향했다. 신선한 생과일을 잘라 만든 각종 디저트로 유명하고, 그만큼 비싼 곳이다. 내가 짠 ‘데이트 코스’는 먼저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전철을 타고 이동, 작은 시장을 돌아보는 코스였다. 카페 앞에서 만난 ‘남자친구’는 전날 받은 사진 속 인물과 달랐다. 업체 쪽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당일 저녁에 출국을 해야 하는 빠듯한 일정이라 따질 시간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고 있던 나를 향해 그가 “자, 그럼 들어가요”라며 활짝 웃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여기서부터는 서로 반말 쓰는 거야”라며 나이부터 물었다. 이날 남자친구 역을 맡은 요시오(가명·25)는 극단에 속해있는 아마추어 배우였다. 일본은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 아닌 평일이다. 그는 연기 외에 특별히 돈벌이를 하는 게 없다고 했다. “내일부터 출근해야 한다”며 푸념하는 나에게 자신은 시간이 많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자기 공연을 꼭 보러 와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는 참고사진 ⓒGettyImagesBank
◆ “남자친구의 밥값, 모두 내가 낸다”…교통비·부가 비용은?

요시오는 시종일관 밝은 태도로 말을 걸어 왔다. “긴장 되나”라고 물은 그는 자신이 더 어리니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내가 특별히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도 대화는 잘 흘러갔다. 대화가 끊기면 요시오가 먼저 말을 걸어 주고, 내가 대답하면 적극적으로 반응해주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다 나왔다. 이 날 카페에서 둘이서 먹은 디저트와 차는 모두 4000엔(약 4만 원)이었다. 물론 모두 내가 냈다. 내가 계산을 마치자 요시오가 곁으로 다가와 “잘 먹었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요시오와 20분 정도 전철을 타고 ‘고양이 시장’ 야나카긴자로 향했다. 도쿄의 작은 시장인데 고양이를 마스코트로 내세우고 있는 곳이다. 도쿄의 전철역은 서울보다 훨씬 복잡해 교통 애플리케이션을 확인하면서도 길을 헤매기 쉽다. 이날은 든든한 ‘남자친구’ 덕에 걱정이 없었다. 역에서 내려 시장까지 가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장 돌아보기는 생각보다 훨씬 금방 끝났다. 이용 시간은 아직 한 시간 반이 남았다. 데이트 코스를 너무 부실하게 짠 탓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탓하지 않고 “사람이 많지 않고 조용해서 참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도쿄 여행의 ‘필수 코스’로 꼽히는 우에노 공원에 가서 산책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우에노 공원에는 작은 신사가 있었다. 사람들은 신사 앞에서 동전을 던지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5엔(약 50원)짜리 동전은 ‘행운의 동전’으로 통한다. 일본어로 ‘인연’을 뜻하는 일본어 단어 ‘고엔(ご縁)’의 발음이 ‘5엔(ごえん)’과 같은 까닭이다. 요시오가 내게 “5엔 동전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대답하자 그는 자신의 지갑에서 5엔을 꺼내 던지고 “같이 소원을 빌자”고 했다. 그때 소원보다 먼저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치사하게 지금 던진 5엔 동전도 이용요금 계산할 때 같이 청구하는 것 아냐? 그러고 보니 아까 타고 온 전철 요금도……?’ 일본의 대중교통 이용 요금은 한국보다 훨씬 비싸다. 또 도중에 스타벅스를 발견한 요시오가 “커피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거절했다. ‘커피를 나 혼자 마실 수도 없고, 돈은 다 내가 내야 하잖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통비나 ‘5엔 동전’은 청구 대상이 아니었다. 요시오는 이날 사전에 고지됐던 이용요금만 받고 돌아갔다.

◆ 오늘 처음 만난 남자친구, 어색한 분위기 속 제안…“손잡아도 될까?”

앞서 업체 측은 남자친구와 손을 잡고 팔짱을 끼는 등 가벼운 스킨십까지는 허용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먼저 말을 꺼내기는 어색했고, 딱히 그러고 싶은 기분도 선뜻 들지 않았다. 공원을 함께 걷던 요시오가 먼저 “손잡아도 될까?”라고 물었다. “그럼”이라며 손을 내밀자 요시오는 “방금까지 추웠는데 손을 잡으니 따뜻하다. 역시 좋다”며 웃었다. 설렌다기보다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팔짱은 끼지 못했다. 손만 잡아도 어색했다.

요시오는 공항으로 가는 열차를 타는 곳까지 나를 바래다줬다. 헤어질 시간이 됐다. 요시오는 “그럼 먼저 계산부터 부탁해도 될까? 아, 이 죄책감!”이라며 나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이번에는 회사에서 일로 만난 거지만, 다음에 일본에 올 때는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 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진심인지는 알 수 없다. ‘결제’를 마치자 얼마 뒤 열차가 도착했다. 그가 나를 살짝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는 열차에 올랐다. 그와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실제로 연인 대행 의뢰가 끝난 뒤 고객과 직원이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경우가 있을까? 답은 ‘아니다’이다. 요시오의 설명에 따르면 회사 규칙에 따라 의뢰가 끝나면 고객의 연락처나 함께 찍은 사진은 모두 지운다고 한다. 연락처는 아예 차단하기 때문에 고객이 연락을 해 왔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고.

◆ 이용 목적은…“인간관계에 따르는 속박이나 노력이 싫어” “소셜미디어 과시용”


‘패밀리 로망스’는 철저하게 직원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이 업체 이시이 유이치 대표는 동아닷컴과 인터뷰에서 “대행 서비스별로 교육 매뉴얼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교육을 진행하는데, 강사가 의뢰인이 돼서 스태프들이 실제로 대행 서비스를 해 보는 방식”이라고 전했다.

이시이 대표는 연인 대행 서비스와 관련해 “서비스 초기에는 중년이 젊은 사람들을 연인으로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평균 나이가 점점 떨어지는 추세다. 30대 초반도 있고, 20대도 있다. 젊은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는 일본 사회의 특징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실제 연인이 있으면 연락도 해야 하고 서로 믿음도 쌓아나가야 한다. 도중에 헤어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가 귀찮다는 이들이 있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연애 감정을 느끼고 싶을 때 이 서비스를 이용한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한 20대 여성이 남자친구에게 차인 뒤 대행 서비스를 신청한 뒤 잘 생긴 남성 스태프와 사진을 찍고 소셜미디어에 올린 것이다. 전 남자친구를 향한 ‘과시용’ ‘복수용’이다”라고 말했다.

그 밖에 기억에 남는 고객의 사례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시이 대표는 “한 여성이 도쿄 롯폰기에 있는 고가의 호텔에서 자기 생일 파티를 열었는데, 우리 회사에서 ‘친구’ 20명을 빌려 갔다. 호텔 방을 하나 빌려서 스스로 생일 파티를 열고, 수많은 친구들에게 축하받는 척 사진을 찍어서 소셜미디어에 올렸다”고 했다. 그는 또 “한 30대 싱글맘 여성의 의뢰였는데, 어린 딸이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더라. 그 여성은 ‘아버지’를 대여했다. ‘실제 아버지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아이에게 너에게도 아버지가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다. 직원이 하루만 아버지인 척 하고 딸과 놀아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정리하자면 이 곳의 고객들은 관계에 따르는 속박이나 노력이 싫은 경우나 다른 이들에게 과시하며 보여주기 위해 서비스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관계’에 드는 노력 등을 돈으로 사는 것이다. 이시이 대표는 “시대의 변화라는 측면도 있다. 과거하고는 ‘관계’의 형태가 달라진 것이다. 또 일본 사회에서는 점점 개인주의적인 이들이 늘어가고 ‘혼자서 재미있게 노는 법’ 등을 소개하는 잡지까지 나오는 마당인데, 이 가운데서도 주변을 신경 쓰는 문화는 남아 있다. 여기에 소셜미디어까지 유행하면서 인스타그램·페이스북 등의 ‘좋아요’나 친구 수를 신경 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고 전했다.

박예슬 동아닷컴 기자 ys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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