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걷는 길, 종로 서순라길

동아일보
동아일보2020-01-20 14: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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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3호선 종로 3가역 8번 출구에서 나와 100미터 정도 직진하면 종묘 돌담이 떡 하니 앞을 막아섭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카페와 와인바, 꽃집 등이 이어져 있습니다. 이 상점들을 왼쪽에 두고 오른쪽 종묘 담벼락 사이에 들어선 일방통행 도로가 ‘서순라길’ 입니다.

요즘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익선동 한옥마을 골목에서 도보로 채 5분이 걸리지 않습니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북적이는 익선동과 달리 서순라길은 상대적으로 한적하고 여유롭습니다.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순라길에서 시민들이 우산을 쓰고 꽃집 앞을 걸어가고 있다. 서순라길은 조선시대 순라군이 야간에 순찰을 했던 길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돌담이 종묘의 담벼락이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7일 오후 서순라길에서 만난 직장인 이여진 씨(32)는 지난해 여름 익선동 맛집을 찾다 우연히 서순라길에 들어오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돌담길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 맛이 좋았고 산책할 때 운치도 있어 가끔 찾아오는 길이 됐습니다.

서순라길에 붙은 ‘순라’는 조선시대 순찰제도로 도둑이나 화재 등을 예방하기 위해 밤중에 궁중과 도성 둘레를 순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순찰을 맡았던 군인이 순라군이었고 이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던 길에 순라길이라는 이름이 자연스레 붙었습니다.


종묘를 기준으로 서쪽 담장 따라 난 길은 서순라길, 동쪽 담장 따라 이어진 길은 동순라길이라고 합니다. 맛집이나 카페 등으로 유명해진 거리들이 대부분 비공식적으로 ‘ㅇ리단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것과 달리 서순라길은 행정주소로 등록된 진짜 도로명입니다. 서울시는 1995년 순라길을 역사문화탐방로로 지정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서순라길의 모습은 1995년 종로구가 길을 차도로 정비하면서 갖춰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종묘 돌담 바로 옆까지 주택과 불법 점유시설이 들어서 있어 통행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50년대 후반에는 일대에 좀도둑이 들끓어 아예 길이 통제되기도 했습니다. 귀금속 상점, 작은 점포, 창고 등이 대부분이던 길에는 2014년경부터 카페, 식당, 술집 등이 모여들었습니다. 주택가인 동순라길 일대에도 최근 카페와 식당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도 서민들이 즐겨 찾는 잔술집이나 탁줏집이 있었죠.” (골목길 해설사 안순화 씨)



800m정도 되는 서순라길 중 종묘광장공원 인근인 남쪽 200m구간에는 지금도 귀금속가게가 많습니다. 나머지 600m구간에 카페, 꽃집, 빈티지 옷가게, 맥줏집, 와플가게, 레스토랑 등이 들어섰습니다.


서순라길을 걷다 보면 중간쯤에 한옥으로 지어진 서울주얼리지원센터 2관이 있습니다. 도심에서 망중한을 즐기려는 사람들이나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 많은 외국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서울의 역사와 함께 변해 온 서순라길은 지난해 9월부터 보도와 가로수 정비에 들어갔습니다. 겨울이 되며 공사가 잠시 중단됐지만 오는 3월 중순부터 정비를 재개할 예정입니다. 서순라길 남쪽 약 200m 지점에는 문화공연 등이 열리는 소통광장도 생깁니다. 서순라길 인근 돈화문로도 정비 중이니, 올 봄이 지나면 유유자적 걷는 사람들 사이에 슬쩍 섞여 봐도 괜찮겠죠?

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