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김밥과 초가을우엉차

sodamasism2019-11-21 06: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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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터미널 편의점. 간단히 요기할 겸 편의점에 들어간다. 아침을 거르지 못하는 타입이다. 과일이 좋을까 밥이 좋을까. 언제나 같은 고민을 하다가 언제나처럼 삼각김밥을 선택한다. 그리고 다음은, 음료.

세 시간 넘게 버스를 타야 하는 상황에서 음료는 필수적이다. 깊게 고민한다. 하늘보리. 초가을 우엉차. 블랙보리. 하늘보리. 초가을우엉. 초가을우엉. 좋아. 이번엔 초가을우엉이다.

하고 많음 음료 중에서 초가을우엉차를 집어 든 건 우연도, 그냥 그런 ‘오늘은 이걸 한 번 마셔볼까’ 정도 선택이 아니다. 1천500원 가격이 쉬운 가격은 아니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엉에게는.

밥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김밥을 참 좋아한다. 김밥을 마음껏 못 사 먹었던 고등학교 때는 김밥 열 줄을 생일선물로 달라고 말한 적이 있다. 김밥 정도야 직접 해 먹을 수 있을 정도 재력을 갖추게 된 대학 시절에는 참치, 김치, 삼겹살 등 갖가지 김밥을 해 먹었다. 그때마다 빠지지 않는 재료가 있었다. 예감하셨겠지만, 우엉. 김밥 단무지 20여 개가 든 팩보다 단무지 10개 우엉 10개가 든 팩을 골랐다. 김밥 10줄이면 충분하고 뭣보다, 호화스러운 김밥이라면 그건 우엉이 든 김밥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어머니가 김밥을 싸줬다. 소풍날이 좋은 건 오직 김밥 때문이다. 당시 우리 집은(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부엌과 거실이 직사각형으로 연결된 구조였다. 나는 내 방을 두고 거실에서 자길 좋아했는데 소풍날 아침에는 특히 그랬다. 지글지글 햄 굽는 소리나 달걀 지지는 소리, 또 탁탁 칼로 도마를 때리는 소리. 그 소리에 슬밋 잠에서 깜빡, 또 깜빡 조금씩 깨어나는 게 좋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분주하게 움직이고 계시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가 요리에 취미가 없으셨던(사실 지금도 없으신) 탓에 더 소중한 모습이었을지도.

세수하고 일어나 어머니 주변을 쫄랑대며 쫓아다니고 조금씩 일을 거든다(지단을 주워 먹는다. 햄은 안 된다. 햄은 딱 10개만 있는 부족한 재료라서. 햄을 먹으면 그건 김밥 한 줄을 먹는 것과 같다). 아침밥은 김밥 꼬다리이고, 가장 예쁜 2단 도시락에 가능한 한 김밥을 많이 넣는다. 2인분 정도. 친구 때문이 아니다. 1인분은 버스에서 먹고 1인분은 점심시간에 먹어야 한다.

아쉽지만 김밥과 어머니의 풍경은 딱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다. 생계전선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는 내게 김밥을 싸주기보다는 잠을 택했다. 2학년 때부터는 3천원을 쥐고 쫄랑쫄랑 집 근처 대왕김밥나라에 갔다. 다행히 24시간 영업했던 집 앞 대왕김밥나라. 어머니가 내 김밥을 포기하셨는데 그 뒤로도 김밥을 먹게 해 주셔서 그 점은 지금도 참 감사하다.

먹고 싶은 만큼, 보고 싶은 만큼 충분히 어머니의 풍경을 보지 못해서 그런지 틈만 나면 김밥을 만들어 먹었다. 김 한 장에 밥 그리고 단무지와 김치 한 줄만 올라가도 좋고, 뭐가 더 올라갈 수 있다면 햄, 계란,

깻잎과 참치 상추도 올려보고 참 여러 가지 올려봤지만 그중에 역시 가장 좋았던 우엉이다. 사실 별맛도 느껴지지 않지만 다른 재료는 평소에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면 우엉은 오직 김밥 먹을 때만 먹는 음식이었으니까, 특별하다. 내가 지금 김밥을 먹을 거라는 신호. 호화스러움, 그 담백함.

먹고 싶은 만큼, 보고 싶은 만큼 충분히 어머니의 풍경을 보지 못해 그런지 김밥은 내게 호화스럽다.

요새는 김밥을 만들어 먹을 시간이 정말 없어서 더욱 호화스럽고...

음료로 싸게 추억을 맛보려는 게 아니다. 한 입 한 모금,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보내는 일은 언제나 중요하다. 본능적으로 고민했고 음료 뚜껑을 (다닥) 열어 한 모금 마셨을 때, ‘아, 역시 이 향기, 이 맛이었지’. 감사하게도 이 한 모금으로 그 기억을 불러왔다.

이 정도면 1천500원 가격은 충분하지. 아니, 넘치지. 아아. 그나저나 차가운 새벽안개에 따뜻한 우엉차 향기는 참 잘 어울린다. 그럼 다음에 터미널에 왔을 때는 뭘 마셔볼까나.

Editor by 도란도란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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