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음료 찾아 카페로 출근합니다, 추억에서 돌아온 음료들

마시즘
마시즘2019-11-20 08:00:01
공유하기 닫기
창밖에는 기다리는 택배 아저씨는 오지 않고, 차가운 겨울 공기만 배달된다. ‘올해는 내님과 꼭 벚꽃을 보러 가야지’라고 생각한 게 어제 같은데 집 밖에 나서니 낙엽이 떨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이런 낙엽이라도 밟으면 즐거웠는데, 어른이 되고 나니 밟고 있는 이것이 낙엽인지 나인지 모르겠다. 낙엽과 내가 물아일체가 된 상태. 안 돼! 시간아 밟지 마. 이대로 부스럭 사라질 수 없어!

그래서 발길을 돌렸다. 메말라버린 나의 감성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음료를 찾아 떠난다. 스마트폰을 꺼내 동료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오늘 출근은 카페로 할게요.



카페로 출근하는 남자
할리스 커피에 가다
(만약 당신이 할세권에 산다면 카페와 독서실과 오피스를 모두 갖춘 것이다)
하루 종일 편의점만 돌아다닐 것 같은 마시즘이지만, 또 그 말이 맞지만. 사실 언제나 카페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인싸력이 부족한 나머지 사람이 몰린다는 카페의 문턱을 넘어보지 못했다. 뭔가 카페 안에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멋져서, 인증샷을 찍기에는 내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적어서 주눅이 든다랄까. 뭔가 내가 입구를 여는 순간 8등신 멋쟁이들에게 체포될 것 같은 분위기야.

(훌륭한 카페의 세 가지 조건, 조명과 콘센트 그리고 의자의 푹신도)
하지만 이곳만은 고향 같은 카페다. 할리스 커피(HOLLYS COFFEE). 잘 나가는 카페들이 테이블 높이를 하나같이 낮추며 누가 먼저 바닥에 커피잔을 내려놓느냐 경쟁할 때. 독서실 책상처럼 최적의 높이를 고집하는 그곳. 와이파이는 물론 테이블마다 콘센트를 구비해둔 금맥 같은 곳. 카공족의 성지. 취준생의 공유 오피스를 말이다. 이곳은 여전하구나.

여전하지 않은 것도 있다. 음료다. 겨울 시즌용으로 신상 음료들이 나왔다. 나는 마치 집에서 커피콩 좀 볶아본 사람처럼 신중하게 메뉴를 읊어봤다. 더블샷 바닐라 딜라이트, 헤이즐넛 비엔나커피, 봉봉 쇼콜라…… 종업원은 묻는다. “뭐로 드시겠어요?” 나는 속으로 몇 번이고 연습한 말을 뱉는다. “그거 다 주세요.”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게 요즘 사람 같았다랄까(아니다). 아침부터 카페에서 코스요리마냥 음료 3잔을 마시는 요즘 남자. 그는 마시즘이다.

묻고 더블로 샷
더블샷 바닐라 딜라이트
(나만 알고 싶었던 히든 메뉴가 출시되어버렸다)
익숙한 녀석부터 시작하자. 바닐라 딜라이트. 일명 ‘바딜’은 할리스를 대표하는 메뉴다. 제주도에 가면 갈치를 먹어야 하고, 전주에 가면 비빔밥을 비벼 먹어야 하듯, 할리스에 오면 바닐라 딜라이트를 마시는 것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다. 할리스에 출퇴근하는 고수들은 이 바닐라 딜라이트에 에스프레소 샷을 추가해서 마신다. 그 치트키가 이번에 정식 출시되어 버렸다.

더블샷 바닐라 딜라이트를 마셔본다. 진한 바닐라향이 코를 맴돈다. 비염을 치료할 것 같은 강력한 향기에 부드러운 이 녀석을 마셔봤다. 달달 구리 했던 바닐라 딜라이트에 샷 추가가 된 것만으로도 굉장히 강력한 풍미가 된다니. 마치 어릴 때 친했던 친구를 어른이 되어 만난 느낌이다. 초딩 입맛에 어울리는 커피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큰 어른이 되었잖아?

라떼는 말이야
헤이즐넛 비엔나커피
(눈사람 마카롱은 얼마나 좋을까 저렇게 예쁨을 받으니)
다음 코스의 시간이 왔다. 헤이즐넛 비엔나커피다. 우리가 아메리카노 노래를 부르기 전에 엄마, 아빠는 비엔나커피를 많이 마셨다. 따뜻한 커피 위에 크림을 잔뜩 올려놓은 비엔나커피(실제 명칭은 ‘아인슈페너’다)는 80년대 인기 메뉴 중 하나였다고 한다. 당시는 크림이 없어서 아이스크림으로 얼추 흉내 내는 곳들도 많았다고.

할리스에서 나온 비엔나커피는 크림이 올라간 버전이다. 그런데 눈덩이 같은 크림 사이에 올라프… 아니 눈사람 모양의 마카롱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 녀석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마시려면 크림과 커피를 휘휘 섞지 않고, 입술을 뾰쪽 내밀어 함께 들이켜야 한다. 이것이 비엔나커피를 즐기는 방법이다. 부드럽고 차가운 크림과 함께 따뜻하고 고소한 헤이즐넛 커피가 들어온다.


(어 이거 터미네이터 명장면 아닙니까)
‘그래 이 맛이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나의 눈사람 마카롱이 사라져 버렸다. 차가운 크림 위에 살던 우리의 마카롱은 따뜻한 헤이즐넛 커피와 한 몸이 되었다. 인어공주, 효녀심청 같은 이야기가 이곳에서 일어나다니. 비엔나커피와의 추억은 눈사람 마카롱처럼 달콤하게 다가왔다가 아쉬움을 남기고 사라졌다. 마… 마카롱은 추가가 안 되겠지?

귀여운 것이 최고
봉봉 쇼콜라
(코코아 위에 몽쉘이라니. 보기만 해도 마음 달달 해지는 조합이다)
커피를 2잔 연속으로 마셨더니 카페인은 가득 찬 것 같다. 이번에는 종목을 바꿔 코코아다. 이름하야 ‘봉봉 쇼콜라’. 달콤해 보이는 코코아 위에 크림이 하얀 산을 이루고 있다. 그 위에 다시 코코아 가루가 뿌려져 있고. 그리고 몽쉘? 몽쉘이 여기 왜 나와.

그렇다. 마티니에 올리브 열매를 놓는 것처럼 봉봉 쇼콜라에는 몽쉘이 얹어져 있다. 자칫 잘못했으면 어린 시절 초코파이로 만든 생일 케이크 같을 뻔했으나. 그냥 몽쉘이 아닌 쁘띠 몽쉘을 택하는 센스를 발휘했다. 작고 귀엽게 생긴 쁘띠 몽쉘 은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다. 음료만 마시려고 했는데 디저트가 딸려오다니. 나는 오늘 또 절약이란 것을 하고야 만 것인가(아니다).

눈사람 마카롱 사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몽쉘을 먼저 한 입 먹고, 봉봉 쇼콜라를 들이켰다. 역시 진정한 코코아의 맛을 느끼려면 찬바람을 조금 맞아야 하는 것 같다. 따뜻하고 달콤한 기운이 몸 안을 감싼다. 심지어 봉봉 쇼콜라를 다 마시고 잔에 남은 코코아 덩어리도 맛있다.

할리스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그렇다 겨울 할리스 컨셉은 레트로… 그리고 귀여움이었다)
할리스에서 (혼자) 음료를 집중 탐구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즐겁게 추억을 나누거나,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덕분에 할리스에서 꿈을 키우던 학생 시절로 시간이 이동한 기분이다. 마음이 훈훈하다. 그렇지. 조별과제였었지, 아무도 안 와서 나 혼자 노트북으로 발표자료 만들며 바닐라 딜라이트 내리 3잔을 마셨었지(…)


낙엽은 후두두 떨어지고 겨울이 다가온다. 새롭고 맛있는 음료를 마셨으니 할 일은 마쳤다. 때로는 잃어버린 여유를 찾아 카페를 찾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

추억을 가득 안고 매장을 내려가니 ‘할리스 다이어리’가 있다. 일요일 아침 디즈니 만화동산에서 봤던 곰돌이 푸잖아. 곰돌이 푸에게 안타까운 사실은 마시즘은 음료 외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보다 차가운 남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거 얼만데요? 얼마면 돼, 몇 잔만 마시면 되냐고!

어린이날 장난감 가게에 들어간 아이처럼 나는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혹시 할리스의 시간은 거꾸로 가는 게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