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 필요없어요” 자폐증 소년이 간직하고 있던 천재성

celsetta@donga.com2017-04-27 15: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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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http://thefindmag.com
1979년 7월 26일 영국에서 태어난 데릭 파라비치니(Derek Paravicini)는 예정일보다 석 달이나 일찍 세상에 나왔습니다. 순탄치 않은 출산 과정에서 뇌에 손상을 입은 아기는 시력을 잃었고, 학습 장애와 심한 자폐증까지 갖게 됐습니다. 데릭의 부모는 혼자서는 옷도 잘 못 입는 아들이 과연 무탈히 자랄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한 줄기 희망이 찾아왔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학교에 갔다가 우연히 피아노 소리를 들은 데릭이 무언가에 홀린 듯 음악실로 향한 것입니다.

난생 처음 피아노 앞에 앉은 데릭은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늘 웅크리고 있던 등은 당당하게 펴지고 불안정하던 다리 자세도 차분해졌습니다. 주변을 경계하며 움츠러들어 있던 몸짓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기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데릭은 건반을 하나하나 눌러 보더니 방금 들은 멜로디를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깜짝 놀란 어머니는 당장 데릭에게 피아노 선생님을 붙여 주었고 이 날 이후로 어린 데릭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데릭은 자폐증으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대신 다른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는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였던 것입니다.



사진=http://tinnhac.com
데릭을 가르치게 된 피아노 선생님 애덤 오클포드(Adam Ockleford)씨도 제자의 재능을 바로 알아봤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으로 예정돼 있던 레슨은 하루 한 번으로 바뀌었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몇 년, 몇 십 년을 투자해야 능숙한 연주자가 될 수 있지만 데릭이 피아노를 마스터하는 데는 고작 몇 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 번 들은 음악은 그게 무엇이든 똑같이 연주할 수 있는 놀라운 재능이 어린 소년 안에 잠재돼 있었습니다.

‌피아노에 익숙해지자 들은 것을 따라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즉석에서 자유자재로 편곡하는 경지까지 이르렀습니다. 데릭은 일곱 살에 단독 콘서트를 열고 9세에는 로열 필하모닉 팝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피아노 신동으로 떠올랐습니다.

“장애 때문에 제대로 교육받기 어려울 것”이라던 주변 예상을 깨고 데릭 씨는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했습니다. 연주앨범을 발표하며 주목 받은 그는 명예 박사학위까지 받을 정도로 음악 분야에서 큰 성취를 이뤘습니다. 데릭 씨의 사연은 BBC등 영국 매체에 소개되며 널리 알려졌습니다. 소년 데릭을 '피아니스트 데릭'으로 성장시켜 준 선생님 애덤 씨도 여전히 제자 곁을 지키며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고 있습니다.

2006년 첫 앨범 ‘Echoes of the Sounds to Be’를 발매한 데릭 씨는 활발한 연주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유튜브, 페이스북 등 온라인으로 리퀘스트를 받아 동영상을 올리는 등 꾸준히 팬들과 소통 중입니다.

데릭 씨는 ‘달과 6펜스’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유명 작가 윌리엄 서머셋 몸(William Somerset Maugham)의 외증손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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