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젊은 꼰대’들…‘대나무숲’에 드러난 대학가 악습

주간동아2017-03-21 11: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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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신입생 환영회(OT)나 단합대회(MT) 자리에서 일부 재학생이 술을 강권하는 등 ‘젊은 꼰대’ 같은 행태를 보여 논란이 되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 [동아DB]
“새터(새내기 새로 배움터·OT) 저녁 술자리에서 한 선배가 여자 신입생들에게 몸매가 좋다느니 평가를 하며 러브샷 등 스킨십을 강요해 상당히 불쾌했다.”

올해 경기 소재 4년제 대학에 입학한 오모(20·여) 씨의 말이다. 오씨는 “재수생이라 선배들과 나이차도 나지 않는데 1, 2년 대학에 먼저 입학했다는 이유로 선배들이 신입생에게 이러한 행태를 보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분개했다.

이처럼 각 대학에서 재학생들이 선배의 권위를 내세워 신입생을 괴롭히는 소위 ‘대학 내 꼰대질’이나 도를 넘은 군기문화가 화두가 되고 있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대학별 ‘대나무숲’이라는 익명 제보 페이지 또는 학내 커뮤니티 사이트에 관련 제보가 잇따르기 때문. 일부 제보는 재학생과 신입생 간 오해로 생긴 해프닝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학내 문화’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던 악습을 짚고 있다. 그 덕에 과거 일부 대학의 잘못된 문화로만 여겨지던 군기문화가 서울 유명 대학에서도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선배 강요 술자리 싫어 학내모임도 꺼려져”
대학 내 대표적인 악습은 신입생에게 재학생이 음주를 강요하는 문화다. 올해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입학한 김모(19) 씨는 “선천적으로 술을 잘 마시지 못해 학내 행사 술자리가 부담스럽다. 매번 상황을 설명하고 술을 거절하지만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는 한잔해야지’라며 강권하는 선배가 꼭 한 명씩은 있어 최근에는 아예 술자리에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예 음주 요구를 거절할 수 없도록 으름장을 놓는 경우도 있다. 2월 18일 서울대 대나무숲에 올라온 제보에 따르면 ‘차별 없는 새터, 강권 없는 새터’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새터를 진행했지만 새터가 끝나자 한 학과 대표가 단체 카카오톡방에 ‘개강 후에는 차별 있는 술자리, 강권 있는 술자리 기대하세요’라는 글을 남겨 학내에서 논란이 됐다. 이후 해당 발언을 한 재학생이 사과문을 내고 학과 대표 자리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음주 강요가 학내 전통처럼 자리 잡은 경우도 많다. 지난달부터 고려대 대나무숲에는 술을 마시면서 신입생이 재학생의 휴대전화 전화번호를 맞히는 ‘업다운’ 게임에 대한 항의가 종종 올라오고 있다. 이 게임은 선배의 전화번호를 맞히지 못할 때마다 벌주를 마시는 것이다. 선배의 전화번호를 맞힐 때까지 신입생은 적게는 소주 2~3잔에서 많게는 반병까지 벌주를 마셔야 한다. 1월 31일에는 서울대 SNS 익명 게시판에 모 학과가 신입생들에게 ‘토복’이라 부르는 바람막이 단체복을 맞추게 했다는 제보가 올라왔다. 이 제보에 따르면 ‘바람막이를 토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술을 많이 마셔 토해도 바람막이 재질의 특성상 잘 씻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지난해 건국대 대나무숲에 게재된 성추행 제보. 재학생들이 신입생들과 술자리에서 성적 행위를 묘사하는 식의 게임을 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동아DB]
대한보건협회 조사에 따르면 과도한 음주에 따른 대학생 사망사고는 2006년부터 2015년까지 10년간 총 22건 발생했다. 일부 선배의 강권이나 술을 거절하지 못하는 대학 내 음주문화가 사고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2월 22일에는 강원 고성군 한 콘도에서 열린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 참가한 인천 소재 대학의 한 신입생이 술에 취해 엘리베이터 기계실에 들어갔다 손가락 3개가 절단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술자리에서 이어지는 장기자랑 같은 신고문화도 신입생을 괴롭힌다. 2월 대학 내 익명 커뮤니티에서는 장기자랑에 대한 신입생들의 걱정이 줄을 이었다. 최근 인천의 한 4년제 대학에 입학한 강모(19) 씨는 “매년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신입생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장기자랑 행사가 대학마다 열리고 있다. 선배들은 매년 해왔으니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장기자랑을 해야 하는 신입생에겐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신입생은 대학 내 권위적인 음주문화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한양대 총학생회가 17학번 신입생 1200여 명을 대상으로 ‘대학생활을 앞두고 가장 걱정되는 점’에 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음주 문제가 38.5%로 1위를 차지했다. 서울의 한 4년제 사립대 총학생회 관계자는 “매년 학생자치단체도 올바른 음주문화 확립을 위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단과대별 대표를 모아 술자리 문화 개선 회의를 여는 등 재발 방지에 노력 중”이라고 해명했다.

강압적 술자리 문화는 종종 성희롱으로 번지기도 한다. 지방 소재 국립대 재학생인 윤모(20) 씨는 지난해 입학 후 개강 총회에서 한 선배의 발언에 아연했다. 윤씨는 “한 복학생 선배가 옆자리에 있던 여자 재학생이 술을 따라주려고 하는 걸 거절하면서 ‘술은 어린 여자가 따라야 한다’며 근처에 있던 여자 신입생에게 술병을 건넸다. 이 발언을 들은 다른 여자 선배가 문제를 제기해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드라마나 개그프로그램에서나 보던 나쁜 상사의 전형적 발언을 20대 초·중반의 대학 선배로부터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 건국대 모 학과 신입생 환영회(OT)에서는 선배들이 펜션에서 잠든 남자 신입생의 속옷을 벗겨 신체 일부에 치약을 바르고 이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사건이 벌어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대학 선배들 꼰대질 직장 상사와 다름없어”
서울의 한 4년제 대학에 다니는 유모(23·여) 씨는 “술자리 게임이나 실언 또는 장난으로 무마되곤 하는 대학가 술자리 성희롱은 내가 신입생이던 시절은 물론이고, 그 전부터 줄곧 있어온 문제다. 과거에는 공론화되지 않아 그 자리에서 문제를 지적하는 선에서 끝났지만, 최근에는 익명 커뮤니티 등이 발달해 과거에 비해 발언이나 행동을 조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2015년 발표한 ‘대학교 MT 등 학교행사 안전관리대책’(대책)에서 입학 전 실시하는 OT는 사전에 응급처치 및 음주문화 교육을 시행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사전 교육이 ‘유명무실’하다고 평한다. 경남 소재 대학 신입생인 임모(19), 정모(19) 씨는 “막상 술자리가 시작되면 일부 선배는 여전히 못 먹겠다는 술을 강권한다”고 말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음주문화에 대한 자성의 움직임이 대학가에서 있길 바라는 마음에 ‘대책’ 안에 강제 규정을 넣지 않았다. 실제로 ‘대책’ 발표 이후 대학 내 음주 관련 사고가 줄어들었다”고 해명했다.



페이스북 제보 페이지에 올라온 이화여대 모 학부 예절지침. 학내 선후배 위계질서 문화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일부 대학에서는 ‘똥군기’라 부르는 이상한 대학 규율을 신입생에게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똥군기는 선배가 후배들을 불러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언을 하는 방식으로 전파됐다면, 최근에는 SNS나 메신저를 통해 전달된다. 2월 22일 페이스북 제보 페이지 ‘대학의 모든 것, 텐덤’에는 이화여대 모 학부 17학번 신입생 단체 카카오톡방에 선배로 추정되는 학생이 보냈다는 예절지침이 올라왔다. 공개된 지침에는 ‘선배에게 큰 소리로 인사하라’ ‘선배가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허락하기 전까지는 문자메시지로만 연락하라’ ‘선배와 술자리에서는 선배의 허락을 받고 귀가할 것’ 등의 내용이 담겼다.

‘군기 잡기’가 심한 학교는 재학생이 신입생에게 얼차려를 주기도 한다.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일부 학과 재학생들이 2월 26일 단합대회(MT)를 간 리조트에서 새벽 5시 반 신입생들을 깨워 구보와 PT체조(팔 벌려 뛰기)를 시키는 영상이 한 투숙객에 의해 3월 1일 인터넷에 공개됐다. 논란이 커지자 해당 학과는 SNS를 통해 사과문을 게시했다.

4년제 지방 사립대 체육학과를 졸업한 박모(27) 씨는 “대학에 입학한 2009년부터 일부 대학의 시대착오적인 군기문화가 매년 대학문화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학생 자치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같은 잘못이 반복되는 만큼 학교나 정부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강 초 각종 학내 단체의 정체 모를 회비도 대학생들을 답답하게 만든다. 돈을 걷는 선배가 후배에게 회비 용처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기 때문. 일부 학교에서는 선배에게 줄 선물을 산다며 신입생들에게 돈을 내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지난해 말 연세대 대나무숲에는 선배들에게 14K 졸업반지를 선물한다며 4학년을 제외한 모든 학년 재학생으로부터 인당 13만 원을 걷었다는 제보가 게시됐다. 제보자는 게시 글을 통해 ‘14K 금반지는 10만~11만 원이면 충분한데 반지를 사고 남은 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각종 회비는 누구 지갑으로 가는지…”
서울 소재 사립대의 교육 관련 학과에 재학 중인 이모(24) 씨는 “학기를 시작할 때마다 개강 총회를 진행한다. 이 개강 총회에 참석하든 안 하든 학과 학생은 모두 5000원을 내야 한다. 이 돈은 개강 총회 참석 후 뒤풀이에 가지 않으면 돌려받는다. 결국 5000원은 총회 불참 벌금이다. 물론 학생회비 사용 등에 대한 내용을 의결하고자 학생들의 총회 참여율을 높이려는 방안이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학생 사정도 어려운데 벌금으로 총회 참여율을 높이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경찰은 새 학기를 맞아 대학가에서 벌어지는 음주 강요, 얼차려, 학생회비를 빙자한 금품 갈취 등을 근절하려고 나섰다. 경찰청은 2월 13일~3월 31일 46일간을 대학 내 악습 행위 집중 신고기간으로 정하고 단속에 들어갔다. 중점 신고 대상은 △선후배 간 위계질서 확립을 빙자한 폭행 및 강요 △과도한 음주 강요 △회비 납부를 빙자한 금품 갈취 △학내 성추행  ·  성폭력이다.

이 밖에도 전국 각 대학 소재지 관할 경찰서에 ‘대학 내 불법행위 수사팀’을 꾸려 학내 인권센터나 상담센터 등과 연계된 상담·신고 체제를 구축했다. 경찰 관계자는 “대학 내 불법행위 신고 내용의 경중에 따라 계도가 필요한 경우라면 학교에서 징계 등 지도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피해 상황이 심각한 수준이라면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대학 내부에서도 자성운동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 사립대 관계자는 “학교에서도 교내 인권센터를 통해 진상 조사를 하고 학내 폭력이나 성희롱 문제에 관해서는 즉각 징계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부당하게 회비를 걷는 문제도 점차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4년제 대학 단과대 학생회에서 활동 중인 최모(22·여) 씨는 “학생회나 각 동아리가 총회 자리에서 회계 명세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등 회비 문제에 대한 학생자치단체의 자성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이 대학의 불합리한 위계질서 문화를 SNS 등을 통해 알리고 학생 공동체가 이를 수용해 고쳐나갈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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