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초’ 정조의 답답한 마음 터준 ‘무’

동아일보
동아일보2016-12-12 11: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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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먼 옛이야기 같지만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발생하면 동치미 국물로 응급치료를 대신한 시절이 있었다. 동치미 속의 무가 가스 중독에 나름대로 효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방에선 무에 기(氣)를 흩어버리는 약효가 있다고 규정한다. 연탄가스도 결국 기의 일종이기 때문에 동치미를 먹는 민간요법이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한방에서 숙지황이 든 한약을 복용할 땐 생무를 조심하라고 하는 이유도 기를 흩어버리는 특징과 관련이 깊다. 숙지황은 본래 혈액을 만드는 작용을 하는 약재로, 무와 함께 먹으면 기가 흩어져 숙지황 기능의 역효과로 백발이 된다는 것.



실록에도 이와 관련한 얘기가 나온다. 선조는 즉위 초부터 스트레스로 밥맛이 없었다. 이황, 이이, 성혼 같은 유학의 대가들 등쌀에 힘들어했고 정통성 논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죽을 지경이 됐다. 그래서일까. 선조는 평소 식욕이 없어 성질이 차고 매운맛이 있는 무만 먹으면서 연명했다. 특히 숙지황이 들어간 한약을 먹게 되면서 어의가 무의 복용을 금지하자 따뜻한 성질의 강화도 순무로 바꾸며 끼니로 삼았다는 애처로운 이야기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무가 재료인 깍두기는 본래 ‘각독기(刻毒氣)’에서 연유한 말로 “독을 없애는 음식”이라는 뜻이다. 1940년 홍선표가 지은 ‘조선요리학’의 “정조의 딸 숙선옹주가 처음으로 각독기를 올려 정조의 칭찬을 받고 점점 민가에 퍼졌다”는 구절에서 근거한 말이다. 골초에 가까운 애연가였던 정조는 자신의 시문집 홍제전서에서 “답답한 마음을 틔우고 울적한 기분을 소통하는 음식으로는 무가 있지만…”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기를 흩어버린다’는 말은 마음에도 작용한다. 마음이 답답한 울증(鬱症), 욕망, 집착을 흩어버린다는 말과 의미를 같이한다. 그래서 무는 ‘채소의 노자’로 불리기도 한다. 한자로도 무(蕪)다. 실록에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엄청난 화증에 시달리며 우황과 금은화를 밥 먹듯이 했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고 보면 무는 정조에게 담배 연기로 인한 독소를 없애고 마음의 화를 없애는 맞춤형 약선 요법이었던 셈. 우리가 즐겨 먹는 단무지 또한 기를 흩어주는 무와 노란 물을 내는 치자가 만난 음식이다.


치자 또한 강한 향으로 기를 외부로 흩어준다. 소염 효능이 강하고 차가운 성질을 갖고 있어 예부터 민간에선 발목 부종을 잡는 데도 쓰였다. 성질이 뜨거운 면류를 먹을 때 무와 치자로 만든 단무지를 즐겨 찾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일본 스님들은 마음속 번뇌를 잊기 위해 ‘다쿠안’ 선사가 만들었다는 단무지를 즐겨 먹는다고 한다. 그들에겐 단무지가 욕망을 잡기 위한 식치(食治)의 음식인 것이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