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들의 땀과 눈물 서린 ‘전복 공물’

바이라인2016-12-04 09: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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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의 한 해녀가 2013년 12월 겨울 바다에서 문어를 잡은 뒤 이를 담을 망사리를 찾으며 자맥질을 하고 있다. 2012∼2015년 제주에 머물며 해녀들의 삶을 기록해 온 박정근 사진작가가 최근 펴낸 사진집 ‘잠녀’에 수록된 사진이다. 열화당 제공 
문헌으로 본 인류유산 ‘제주 해녀’ 
“가슴에 끈으로 짠 주머니(망사리)를 묶은 곽(태왁)을 안고, 손에는 쇠꼬챙이(비창)를 잡고, 이리저리 헤엄치다가 물속에 잠긴다. 물속에 들어가 돌에 붙어있는 전복을 확인하면, 빈껍데기를 뒤집어 놓아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하고 다시 물 위로 올라온다. 숨이 차서 소리를 내는데 ‘휘익’ 하는 소리(숨비소리)를 오래도록 낸다. 생기가 돌아오면 다시 물에 잠긴다. 먼저 표시해 두었던 곳에 가서 비창으로 따서 망사리에 넣고 돌아온다.”

 조선 숙종 때 문인으로 1706∼1711년 제주도에 유배됐던 김춘택의 ‘잠녀설(潛女說)’ 중 일부다. 300년 전 잠녀(해녀)들의 작업 모습이 생생하다. 지난달 30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제주해녀문화’의 역사를 박찬식 제주발전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장의 도움을 받아 문헌 기록 속에서 찾아봤다.

전복을 공납하는 제주도민의 고역을 기록한 김상헌의 남사록. 제주해녀박물관 제공
 제주의 전복과 관련된 최초의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 13년(503년) 시기로 거슬러간다. “가(珂·전복에서 나온 진주)는 섭라(涉羅·탐라국의 또 다른 이름)에서 생산된다”는 구절이다. 당시에도 해녀와 같은 이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해녀들은 오늘날에 비해 훨씬 위험한 상황을 겪었다. 김춘택이 만난 해녀는 말한다. “한 번 물에 잠겨 전복을 찾지 못하면 다시 물에 잠기곤 하는데 전복 하나를 따려다가 몇 번이나 죽을 뻔하곤 한다. 물밑의 돌은 모질고 날카롭기도 하여 부딪혀 죽기도 한다. 함께 작업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거나 얼어 죽는 것을 보기도 했다. 나는 요행히 살아났지만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해녀들이 이처럼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 건 공물로 바칠 전복을 따야 했기 때문이다. 17세기 말 제주의 해녀는 약 1000명이었는데, 원래 이들은 대부분 전복이 아니라 미역을 땄다. 진상할 전복을 캐는 것은 주로 포작인(浦作人·제주 방언 ‘보재기’)으로 불리는 남자들의 일이었다.

 “포작하는 자들은 홀아비로 죽는 자가 많다…. 본주(本州)에 바쳐야 할 전복의 수가 극히 많고, 관리들이 공(公)을 빙자하여 사리를 도모하는 것이 또한 몇 배나 된다. 그 고역을 견디지 못하여 흩어져 떠돌다가….”

 1601년 제주도에 어사로 파견됐던 김상헌(1570∼1652)의 남사록(南사錄)에 나오는 기록이다. 제주 목사(牧使)가 해적을 정탐한다는 구실로 포작인들을 남해안의 섬으로 데려간 뒤 전복을 따도록 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광해군일기 1608년 기사도 “전복을 잡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로, 종일토록 바닷속에 들어가도 겨우 한두 개를 건진다”고 나온다.

 수많은 포작인들이 수탈과 고역을 피해 제주도에서 전라도, 경상도 해안으로 도망쳐 나갔고, 300여 명이던 포작인은 18세기 초 88명으로 줄어든다. ‘제주도에는 여자가 많다’는 말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1694년 제주에 부임한 목사 이익태는 전복을 딸 남자가 급감하자 미역을 따던 해녀들에게도 전복을 캐 바치도록 했다.

 박찬식 센터장은 “이때부터 전복을 캐는 사람을 뜻하는 ‘비바리’가 해녀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며 “해녀의 역사는 제주 여성 수난의 역사”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