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로와 마오쩌둥, 공통점과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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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닷컴2016-12-01 10:5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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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의 두 주역,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왼쪽)
‘20세기의 위대한 지도자’ ↔ ‘20세기의 야만적 독재자’
완전히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쿠바의 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8~2016.11)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11월 25일 9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혁명의 꿈을 심어주고, 세계 최강의 제국인 미국을 바로 머리 위에 놓고 평생을 투쟁해 온 카스트로의 죽음은 우리에게 ‘혁명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고 있다.  

‌◆20세기 공산혁명의 주역, 모두 역사 속으로

러시아 혁명을 이끈 블라디미르 레닌(1870.4~1924.1), 간난신고 끝에 중국의 붉은 혁명을 성공시킨 마오쩌둥(毛澤東: 1893.12-1976.9), 베트남 공산 혁명의 주역 호치민(1890. 5~1969.9), 유고슬라비아 공산화의 지도자인 요시프 티토(1892.5~1980.5), 북한 정권을 수립한 김일성(1912.4~1994.7)의 뒤를 이어 카스트로마저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짐에 따라 이제 공산 혁명을 이끈 1세대 지도자들은 모두 사라진 셈이다.
카스트로는 쿠바의 소도시에서 태어나 아바나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1947년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침공에 합류하고 1948년에는 콜롬비아의 도시폭동에도 참가한 그는 1953년 쿠바의 독재자인 바티스타(1901-1979) 정권에 항거하다 체포되었으나, 1955년 특사로 풀려나 멕시코로 망명, 1956년부터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20세기 세계를 뒤흔든 각국의 공산화 1세대 지도자들. 왼쪽부터 구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 사회주의 중국의 마오쩌둥, 베트남의 호치민,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 북한의 김일성,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카스트로와 마오쩌둥, 혁명의 주역 공통점, 차이점도 많아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정권을 세워 총리에 취임한 그는 미국을 비롯한 외국자본을 몰수하는 등 급진적인 혁명정책을 펼쳤으며, 1961년에는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기도 했다.
2008년 국가평의회 의장직 사임으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여러 면에서 중국 혁명의 아버지인 마오쩌둥과 비교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출생과 성장 과정에서 두 사람은 꽤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고, 이는 이후 정책수립이나 집행과정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카스트로는 스페인에서 쿠바로 이주해 온 사탕수수 농장주가 아내가 죽은 후 카나리아제도 출신의 하녀를 침실에 끌어들여 낳은 아들이다. 그는 학교시절 상당히 반항적인 이미지가 강했고, 실제로 아바나에 있을 때는 거리의 부랑아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반면 마오쩌둥은 후난(湖南) 성 중농(中農)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꽤 모범적인 청년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대학을 졸업하지는 못했다. 카스트로가 명문 아바나대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원시적 농업 기반, 외세 침탈, 산업화 기반 미흡 3대 혁명 토대 공통점

이들이 젊은 시절 나라의 현실은 비슷한 측면이 많다. 쿠바는 미국 자본을 등에 업은 바티스타 정권에 의해 민중의 생활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중국 역시 신해(辛亥)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오랜 세월 동안 군벌과 외세의 침탈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농업에 기반한 취약한 경제구조와 민중생활의 파탄은 이들이 혁명을 일으키게 된 동기가 되었음은 물론 혁명 성공 이후에도 직면해야 할 1차적인 과제가 되었다. 

혁명의 과정은 비슷해 보이지만 이를 추진한 중추세력은 사뭇 다르다. 카스트로의 혁명은 마에스트라 산맥의 깊은 숲 속에서 게릴라전투로 시작됐지만 그의 옆에는 언제나 의사 출신의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6~1967.10), 역시 의사였던 첼리아 산체스(Celia Sánchez: 1920-1980)와 같은 지식인들이 있었고, 혁명의 과정에서도 지식인층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반면 마오쩌둥의 혁명은 철저히 농민에 기반을 둔 혁명으로 지식인층은 혁명의 연대 대상에 지나지 않았던 측면이 있다. 단지 마오쩌둥의 혁명이 징강샨(井岡山)에서 시작되었다는 점만이 닮아 있을 뿐이다.  

1961년 4월 미국이 배후 공작한 쿠바 피그스만 침공 작전. 쿠바에서 탈출한 1500여 명의 반 카스트로 성향의 젊은이들에게 무기를 대주고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하려 했으나 미리 정보가 새나가는 바람에 상륙 시도와 함께 대대적인 쿠바군의 공격을 받아 6일만에 완전 실패로 끝났다. 쿠바 섬의 가운데 아래쪽이 피그스만.
◆쿠바-중국, 반미(反美)와 연미(聯美) 배경과 과정 크게 달라

대미(對美) 정권을 잡고 나서 자신의 일인통치를 강화하려 시도했다는 점은 둘 다 상당히 닮아 있지만 그 과정은 약간 다르다. 마오쩌둥의 경우 일인통치체제의 강화를 위해 1957년의 반(反)우파투쟁, 1958년의 삼면홍기 정책 등을 추진하다가 끝내는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는 등 주로 국내적인 모순요소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반면 카스트로는 집권 직후인 1959년 미국을 방문하여, 유럽부흥을 위해 입안된 마셜플랜을 라틴아메리카에도 적용하여 300억 달러의 원조를 부탁하기도 하고, 주로 미국자본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보건산업을 국유화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축적해 나갔다.
미국과의 관계는 두 사람의 가장 뚜렷이 구분되는 대목이다. 카스트로는 집권 직후 미국을 방문하여 당시 미국의 부통령인 리차드 닉슨을 만나기도 하는 등, 현실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쿠바경제의 실상을 감안한 행보를 이어나갔다. 그와 미국이 완전히 철천지원수가 되어 버린 것은 1961년 4월 16일 미국 CIA 의 지원을 받는 무장세력이 쿠바를 침공한 ‘피그스만 사건’과 이에 이은 쿠바미사일 위기였다. 반면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 국공내전에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한지 1년 밖에 지나지 않은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하여 미군과 싸우는 등 시종일관 미국과는 대립각을 세워나갔다. 카스트로의 대미정책은 소련의 붕괴와 동구공산국가들의 몰락 이후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수정되었고, 마오쩌둥은 세계질서의 재편 측면에서 미국의 닉슨대통령과 손을 맞춰 바뀌게 된 측면이 강하다. 


◆카스트로, 반대파 포용↔마오쩌둥, 반대파 탄압 반대파에 대한 태도도 달랐다. 카스트로는 그 자신이 거대한 라틴아메리카 혁명운동의 중심이었기에 이에 기반한 반대파에 대해 가혹한 칼날을 휘두를 수 없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그는 혁명동지였고 생사고락을 함께 한 사이였지만 그와는 투쟁노선이 확연히 구별된 체 게바라를 중앙은행장에 임명하고, 리버럴리스트 변호사였던 마뉴엘 우루치아(Manuel Urrutia)를 대통령에 임명하는 등 진영 간의 균형에 애썼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혁명 후 자신의 정책과 권위에 도전한 류샤오치(劉少奇)나 덩샤오핑(鄧小平) 등을 문화대혁명을 통해 잔인하게 짓밟았다. 자신의 은퇴 이후에 대한 대비는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마오쩌둥은 생전에는 물론 죽는 순간에도 절대 자신의 후계에 대해 말한 적도 없고 계획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이미 2006년 장내출혈 수술을 계기로 자신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잠정적으로 권력을 승계한 다음, 2008년에는 공식적으로 모든 공직에서 은퇴하고 동생에게 모든 권력을 물려줬다. 마오쩌둥이 죽는 순간까지 권력을 한번도 놓아본 적이 없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인 것이다.  

쿠바 섬 동남쪽 해변에 위치한 미국의 관타나모 기지. 전체 면적 1182㎢로 서울(605㎢)의 2배에 가깝다. 1903년 쿠바가 스페인에게서 독립한 직후 쿠바 정부와 쿠바 독립을 도와준 미국 정부 사이에 계약에 따라 토지가 임대됐다. 1934년 영구임대 조약이 맺어졌고 쿠바 공산화 후에도 토지임대는 계속되고 있다. 공산화 이후 토지 임대가 계속 가능했던 것은 카스트로 정부가 미국 정부로부터 임대료를 딱 한 번 받은 적이 있어 이는 전임 정부의 영구임대를 승계한 것이라는 미국의 주장을 반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둘 다 타계 순간까지 국내에 외국 점령지 존재

마오쩌둥은 죽는 순간까지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돌려받을 수 없었다. 홍콩은 마오쩌둥을 이은 덩샤오핑이 되찾았다. 반면 카스트로는 죽는 순간까지도 쿠바 섬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미군의 관타나모 기지를 되찾지 못하고 죽었다. 마오쩌둥의 죽음은 세계적인 사건이었고 전 중국이 슬퍼했지만 외국에서 마오쩌둥의 죽음 때문에 조기를 게양할 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카스트로의 죽음은 그만큼의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사건은 아니지만 이미 북한과 베트남이 조기를 게양하는 등 상징적이나마 존경을 표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1871년 파리코뮌으로 시작한 공산주의 운동은 이제 역사의 한 챕터를 덮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조는 과연 이대로 사그라질지, 아니면 다시 되살아날지, 다음 시대는 어떤 조류가 이 세상을 흔들지 자못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유일(劉一) 여의주식회사 상임고문 koreandanie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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