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내는 결혼식 대신 빛나는 결혼식… 42일간의 웨딩마치

동아일보
동아일보2016-11-28 09:3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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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왼쪽) 정현우 씨는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 전시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찍은 사진을 가리키며 “평생 기억에 남을 결혼식을 올렸다. 길 위의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하해준 순례자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 결혼식에서 채 1분이 걸리지 않는 ‘신랑 신부 행진’을 무려 42일간 한 부부가 있다. 올해 3월부터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900km를 걸은 이혜민(29) 정현우 씨(30) 얘기다. 많은 비용이 드는 데다 정신없이 치러지는 결혼식 대신 이들이 선택한 길이다. 두 사람은 순례 중 마음에 드는 곳이 나오면 작은 면사포와 나비넥타이를 꺼내 수시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  

 이 이야기를 담은 책 ‘세상에서 가장 긴 결혼행진’(사진)을 최근 펴낸 부부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20일 만났다. 카페 한쪽 벽에는 순례길에서 찍은 사진 20장이 전시돼 있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커플링이 반짝거렸다. 이 씨는 손가락을 쫙 펴 보이며 “양가 어머니들이 주신 목걸이를 녹여 만든 유일한 예물”이라며 미소 지었다.

 그래픽디자인 회사 편집자였던 이 씨와 웹디자이너인 정 씨는 사표를 내고 길을 떠났다. 한 달에 하루 이틀밖에 쉬지 못하고 매일 밤 12시가 넘어 퇴근하는 삶에 지쳤기 때문이다.

 가장 큰 고비는 양가 부모님 설득하기. 의의로 ‘쿨하게’ 허락이 떨어졌다.

 사전에 서울 성곽길과 제주 올레길을 걸으며 ‘전지훈련’을 했지만 순례길은 만만찮았다. 갑자기 눈이 펑펑 내리는가 하면 수시로 폭우가 쏟아져 진흙탕 속에서 헤맸다. 하지만 6년간 연애한 것보다 42일간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됐단다.

 “데이트할 때는 제가 모든 걸 결정했는데 순례길에서는 현우 씨가 길을 척척 찾고 제 다리에 붕대도 감아주며 이끄는 거예요. 이렇게 듬직한 면이 있나 싶어 놀랐어요.” “혜민이가 발목과 무릎의 통증이 심한데도 끝까지 걸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작은 면사포를 쓴 이혜민 씨와 나비넥타이를 맨 정현우 씨. 이혜민 정현우 씨 제공 
  ‘빚내는’ 결혼식 대신 ‘빛나는’ 결혼식을 하고 싶었던 이들의 행진은 외롭지 않았다. 순례길에서 만난 스페인과 호주 음악가는 축가를 불러줬고, 한국에서 온 스님은 주례사 같은 덕담을 건넸다.

 이들은 순례를 마친 후 1개월 반 동안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를 여행했다. 3개월간 쓴 돈은 1200만 원으로, 예단과 신혼여행비까지 포함한 보통 결혼 비용의 5분의 1 수준이다. 귀국 후 이 씨는 1인 출판사 ‘900km’를 차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책을 냈다. 초판 700권 가운데 후원자 300명에게 보내고 난 나머지 책이 모두 팔려 2쇄로 1000권을 더 찍었다.

 순례 뒤 이들의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게임회사에 취직한 정 씨는 “승진, 커리어 등을 고민하며 앞날을 불안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게 됐다”, 이 씨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며 살지 않기로 했다. 조금 벌더라도 재미난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합창하듯 당부했다. “두 사람의 의미 있는 행위만으로도 결혼이 성사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들의 표정은 햇살처럼 환했다. 순례길에서 등산복에 작은 면사포를 쓰고 넥타이를 맨 채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 모습처럼.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