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하겠지만 나도 억울하다? ‘생존본능’ 같은 권력집착

주간동아
주간동아2016-11-22 1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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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 혼란스럽다. 박 대통령은 두 차례 대국민사과를 했지만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먼저 10월 25일, 사전 녹화방송 형식으로 진행된 90초 분량의 1차 사과는 무미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처음으로 최씨의 국정 개입을 일정 부분 인정했지만, 형식적 대응에 불과할 뿐 적극적인 사과라고 볼 수 없었다. 이에 국민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결국 박 대통령은 열흘 만인 11월 4일 추가로 대국민사과를 했다. 두 번째 대국민사과는 9분 10초 분량으로 처음 90초에 비하면 5배 이상 길었다. 또한 사전 녹화가 아닌 생방송으로 진행됐으며, 방송사에 미리 원고를 배포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의 표정과 말투에서 약간의 변화가 감지됐다. 사과문 낭독 시 잠시 울먹이는 등 비장함과 진솔함을 강조하려는 것처럼 비쳤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감정은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감정의 깊이가 그리 깊지 못했다는 뜻이다.





11월 4일 시민들이 서울역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씨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해 사과하고 검찰 조사 수용 입장을 밝히는 대국민담화 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합리화: “나도 사람이라 외로웠다” 가족도 내친 사람이?
박 대통령은 현재 ‘합리화(rationalization)’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다. 합리화는 빈번히 사용되는 정신 방어기제다. 정당화할 수 없는 행동이나 충동에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그럴듯한 설명이나 이유를 갖다 대는 행동을 뜻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상황을 받아들이다 보니 남들은 거짓으로 받아들이는 행동에 대해서도 결코 거짓이라고 생각지 않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국민은 대통령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또한 “홀로 살면서 챙겨야 할 여러 개인사를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 오랜 인연을 갖고 있던 최순실 씨로부터 도움을 받게 됐고 왕래하게 됐다”는 내용 역시 합리화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최순실을 경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는 항변인 것.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만한 얘기다. 하지만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되는 순간 공과 사를 구분해 최씨를 멀리 했어야 한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얘기다.




이상화: 최태민-최순실 향한 무조건적 신뢰
사과문에서 유독 눈에 띄는 내용은 “청와대에 입성한 후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봐 가족과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냈다”는 부분이다. 이 대목이야말로 국민이 가장 실망하는 부분이다. ‘아니! 친인척 비리를 막고자 가족과도 왕래를 끊은 모진 사람이, 혹은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고자 한 사람이 어떻게 그저 지인일 뿐인 최씨를 옆에 두고 그리 믿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최씨는 박 대통령에게 가족보다 더 중요한 존재란 말인가’ 하는 허탈함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박 대통령은 최순실 씨를 ‘이상화(idealization)’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화란 한 개인을 비현실적으로 과장해 그에게 전적인 신뢰와 존경, 사랑 등을 쏟는 행동을 뜻한다. 박 대통령을 누구보다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여기던 국민이라면 박 대통령이 국정농단 혐의를 받는 사람 따위에게 푹 빠져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치밀 것이다. 더군다나 박 대통령이 최태민 씨에 이어 그의 딸에게까지 이상화를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대를 이은 이상화’에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재화: 최순실을 ‘교주’로 받들었을 가능성은 낮다
한편 박 대통령은 사이비 종교 문제나 청와대에서 굿을 벌였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일체 부인했다. 만일 소문이 사실이라면 박 대통령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박 대통령의 말대로 뜬소문일 뿐이라면 대통령의 정신건강 상태나 현실 판단 능력은 ‘그나마 다행’인 축에 속한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은 교주를 ‘내재화(introjection)’하기 때문이다.

내재화란 상대방의 모든 것을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현상인데, 이는 원시적 형태의 동일시이자 병적인 경우가 많다. 세간에 떠도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300명 인신공양설’은 사이비 교주의 교리를 내재화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는 내재화 가능성이 극히 낮다.


만약 박 대통령이 최씨를 교주로 삼고 그를 내재화했다면 이미 심리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극도의 정신적 혼란 상태에 빠졌을 테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필자 소견으로는 박 대통령은 적어도 사이비 종교에는 빠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가족 대신 특정 지인에게 너무 많은 부분을 의지한 나머지 ‘인의 장막’에 갇혀 농락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권력 놓으면 안 된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
무엇보다 이번 사과문의 백미는 박 대통령의 여전한 권력 의지다. “국민께서 맡겨주신 책임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 각계의 언론인들과 종교 지도자분들, 여야 대표님들과 자주 소통하면서 국민 여러분과 국회의 요구를 더욱 무겁게 받아들이겠다”는 문장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권력 의지는 뒤집어 말하면 ‘생존욕구’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권력을 전부 내려놓았을 때 느낄 상실감과 두려움이 몹시 클 것으로 보인다. ‘문고리 3인방’을 포함한 최측근이 전부 잘려나간 상태에서 향후 벌어질 일에 대한 두려움이 오히려 권력 집착을 더욱 부채질했을 공산이 크다. 그렇기에 현재 박 대통령이 취하고 있는 정치적 행보는 생존을 위한 당연한 몸부림으로 해석된다.

‌손석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학박사 psysohn@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