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속 백마 탄 왕자가 바람둥이였다니…그래픽노블 ‘페이블즈’

동아일보
동아일보2016-11-18 09: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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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책 속 주인공들이 다 현실에 살아있다면? 그래픽노블 ‘페이블즈’는 이런 상상 이상의 상상이 가득한 작품이다. 영국 전래동요 ‘리틀 보이 블루’의 소년 파랑과 신데렐라, 마왕 앞에 선 늑대인간 ‘빅비’(오른쪽부터)는 동화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시공사 제공
발칙한 상상력의 그래픽노블 페이블즈
★★★★★

 성급하다 타박하지 않는다면 먼저 별점부터 주련다. 이 만화는 별 다섯 개, ×× 돌침대다. 점수로 치자면 10점 만점에 9.9점. ‘대박 짱.’ 완전 끝내준다. 몇몇 작품이 눈에 밟히긴 하지만, 지금까지 봤던 미국 그래픽노블 가운데 최고라고 꼽고 싶다.

  ‘페이블즈(Fables)’는 제목 그대로 우화나 동화를 다룬 만화. 피노키오, 미녀와 야수, 개구리왕자, 빨간 모자…. 떠올릴 수 있는 동화 캐릭터가 총출동한다. 그런데 이들이 사는 곳이 어디? 바로 21세기 미국 뉴욕 한복판(혹은 인근 농장)이란다. 그러니까 책에서 보던 온갖 인물과 동물들이 ‘동화나라를 뛰쳐나와’ 현실에 산다는 발칙한 상상력이 이 작품의 중요 기반이 된다.

 캐릭터 설정 또한 기가 막히다. ‘백마 탄 왕자(Prince Charming)’를 예로 들어보자. 곰곰이 생각해 보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깨운 것도, 연회장에서 유리 구두를 주운 이도 ‘차밍 왕자’였다. 만약 이 왕자가 동일 인물이라면? 즉, 백마 탄 왕자는 백설과 숲속 공주, 신데렐라와 차례로 세 번이나 결혼했다 이혼했단 얘기가 된다. 현실에서도 여전히 온갖 여성을 유혹하는 ‘매력(charming)’을 내뿜는 호색한이다.

 또 다른 주요 캐릭터 ‘빅비’도 기존 인식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빅비는 ‘크고 나쁜 늑대(Big Bad Wolf)’의 줄임말. 맞다. 빨간 모자와 아기돼지, 이솝우화 등에 나왔던 그 늑대 말이다.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그는 어떤 이유로 개과천선한 뒤 지금은 약자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심지어 백설 공주를 상사로 모신 채.

 한데 이들은 도대체 왜 뉴욕에 살고 있는 걸까. 여기서 ‘동화나라를 뛰쳐나왔다’는 데 주목해 보자. 원래 당연하게도 이들은 동화 속에서 살았다. 그런데 수백 년 전 전쟁이 벌어지며 인간세계로 넘어온 것. 무서운 ‘마왕’의 폭정에 쫓겨 목숨을 부지하러 탈출했다. 허나 그들인들 왜 고향 땅이 그립지 않겠나. ‘뉴욕 임시정부’를 세우고 권토중래를 꿈꾼다. 어디서 본 듯한 ‘동화 독립군 vs 마왕 제국’이란 대결 구도가 펼쳐진다.

 국내에선 아직 이 만화가 큰 주목을 못 받고 있지만, 현지에선 2002년부터 13년이나 연재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만화의 아카데미상’ 아이스너상을 14번이나 받았을 정도. 빅비가 주인공인 게임 ‘더 울프 어멍 어스’도 출시됐고, 몇 년 전부턴 영화화 움직임도 일고 있다. 국내에선 시공사에서 2012년 양장판 1권을 시작으로 지난달 말 10권까지 나왔다. 백소용 만화부장은 “내년에 13권까지, 2018년 마지막 권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시 말하지만 ‘페이블즈’, 무지하게 재밌다. 동화가 책 밖으로 튀어나온 얘기를 읽는데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간 미국식 만화에 심드렁했던 독자라도 생각이 바뀔 만한. 다만 별별 사람이 다 있는 세상이라 0.1점은 뺐다.

 게다가 이건 또 무슨 마법인지. 며칠 전 처음부터 다시 읽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꼭두각시를 앞세워 정권을 주무르는 배후세력. 권력을 잡으려 억지 공약을 남발하는 선거. 자신의 이상만 내세우며 다수의 행복을 짓밟는 정치인. 게다가 그림자 속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마녀까지. 이럴 수가. 페이블즈는 뉴욕이 아니라 서울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던가. 어쩐지. 지금 이게 현실일 리가 없지. 그래, 이젠 제발. 얼른 너희 세상으로 꺼져버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