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이가 들면 세월은 빨리 가는가?

동아사이언스
동아사이언스2016-10-31 10: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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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면 우리 동네 활엽수들이 노랗고 붉은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다. 그중 엄마 손을 놓고 마구 뛰어가는 개구쟁이 꼬마 같은 성급한 단풍잎들은 어느새 제 집을 떠나 서둘러 가지에서 내려온다. 가을의 복판이다. 아직 두 장의 달력이 남았지만 중년을 넘긴 분들은 벌써 한 해가 저문다고 느낄 터이다. 인생을 사계(四季)에 비유한다면 그분들은 가을을 지나쳤거나 한가을에 서 있겠기에 한 계절을 남겨둔 마음이 허전하기 때문일 테다. 그러니 세월의 가파른 물살을 느끼기로는 겨울 색인 백발을 손빗으로 쓸어 올리는 노인분들은 말할 것도 없겠다.


GIB 제공
반면, 누구에게나 연둣빛 새싹이 돋고 샛노란 개나리가 피던 봄날은 있었겠지만, 그 계절의 뛰노는 아이들은 봄볕에 수줍은 진달래가 피어나도, 봄비에 순결한 목련 잎이 떨어져도 안중에 없기 마련이다. 자신이 꽃이기에 꽃이 아름다운 줄 모르는 건 당연할 테니 말이다. 그 여린 꽃이 지고 푸른 잎 무성한 진초록의 청춘이던 여름의 시절을 보낼 때도 인생은 아직 멀었다고 여기는 건 자연스런 세월의 속도감일 테다.



돌이켜보면 내 경우엔 이십대 시절이 가장 길었던 듯하다. 열 살까지야 몇몇 편린들 말고는 인상적인 장면의 기억이 별로 없으니 인생의 책으로는 몇 페이지 안 될 테고, 십대 때는 단조로운 학창 시절의 반복된 생활이었기에 그날이 그날 같았지만, 성인이 된 이십대는 여러 단계의 활발한 생활이 펼쳐져 기승전결로 치자면 ‘승’(承)에 해당되는 때였던 것 같다. 재수 생활과 대학 생활, 군복무와 복학 생활, 취업 준비와 직장 생활, 연애와 결혼이 모두 이십대에서 일어난 일이니 말이다.

그 후 삼십대에는 정신없이 바쁜 직장 생활과 가정생활이 곧게 이어졌지만 이십대에 비하면, 후반에 독립적 사회생활의 길을 간 것 말고는 인생을 가름하는 큰 변화는 없었던 듯하다. 이후 사십대는 섬사람의 일상처럼 단조로웠다. 아마도 이런 인생의 행로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일반인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그리고 느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한계령의 내리막길로 접어든 자동차처럼 세월에 가속도가 붙는다는 것을. 변속기를 저단에 놓아 엔진브레이크를 이용해도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뗄 수 없게 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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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손목에서든 시곗바늘은 똑같이 돌아갈 텐데 왜 세월의 바퀴는 연배에 따라 다른 속도로 굴러갈까. 오래전, 연만하신 어느 문학평론가에게 들은 말이 떠오른다. 어린아이들에겐 재밌게 뛰놀았던 하루는 금세 지나가지만 사계의 큰 수레바퀴는 더디 굴러간다. 반면, 온종일 무료한 노인에게 하루 낮과 밤은 길기만 하지만 춘하추동의 계절은 시위를 떠나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살처럼 지나간다. 왜 그럴까. 세월은 ‘시간’을 느끼는 당사자의 나이와 비례하기 때문이란다. 열 살짜리 아이에게 1년은 자기 인생의 ‘10분의 1’이나 되기에 무척 긴 시간이지만, 70세의 노인에게 1년은 그분이 살아온 인생의 ‘70분의 1’밖에 안 되기에 그만큼 짧게 느껴진다는 논리다.


21년 전에 별세하신 내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어느 가을날, 마루에 앉아 마당가에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바라보시며 독백처럼 말씀하셨다. “내가 저 단풍을 몇 번이나 더 보겠나......” 그 말씀을 기억하는 나를 비롯해 할머니의 여러 자손들도 앞으로 몇 십 년 후면 할머니의 행로를 뒤따를 것이다. 그때엔 나의 할머니는 누구의 기억에서조차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시간은 직진해도 이 세상의 모든 시곗바늘은 멈출 것이다. 지구과학자들의 말처럼 지구의 나이가 벌써 중년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지나가는 시간이 먼 훗날, 아주 먼 훗날의 어느 날에 당도하면 태양계에 지구가 있었고 그곳에 지구인이 살았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시간은 흘러, 그날의 마지막 지구 별빛이 우주를 건너 수만 광년을 달려가서는 어느 고요한 지상의 밤하늘에 잠시 반짝이다가 꺼질 것이다. 오늘 저녁에 내가 바라본, 어느 단풍이 떠난 빈 나뭇가지처럼.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스페셜’ 코너에 [생활의 시선]을 연재하고 있다.

※ 편집자주
뉴스를 보다보면 무엇인가를 분석해서 설명을 해주는 내용이 대다수입니다. 그래야 원인을 정확하게 찾고,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끔은 고개를 들어 사물을 그대로 보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대상을 온전히 바라보면 분석한 내용을 종합할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시인의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는 ‘생활의 시선’을 매주 연재합니다. 편안한 자세로 천천히 읽으면서 감정의 움직임을 느껴보세요.


윤병무 시인 ybm1966@hanmail.net

섬네일=영화 '엑스맨: 아포칼립스' 퀵실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