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살롱 영업부장, '조직원'이던 18세 소년의 미래

스포츠동아
스포츠동아2016-10-02 08: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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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북의 한 룸살롱 영업부장이자 ‘조직’의 일원이었던 18세 소년은 그저 “내일 없는” 일상을 이어갔다. 중학교를 마쳤지만 부모에 대한 막연한 반발심과 하릴없는 10대 시절을 막 지나치는 즈음이었다. 한 힙합곡이 귀에 들었다. 갱스터 힙합의 대명사 사이프러스 힐의 ‘핸드 온 더 펌프’였다. 노래는 소년의 인생을 단박에 바꿔 놓았다. 소년은 “또라이” 소리를 들으며 ‘조직’을 뛰쳐나와 “주머니에 1000원 한 장 없이” 오로지 음악에만 빠져 들었다. 때와 시기, 인생의 계기는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인가.

17년의 세월이 지났다. 소년은 이제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프로듀서가 됐다. 용감한형제.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많은 가수들 특히 걸그룹이 일군 케이팝의 한 페이지는 온당히 그의 몫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선 성과이지만 그의 빛나는 시절은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일지 모른다. 

-왜 그렇게 방황했을까. “내일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친구들과 노는 게 좋았다. 아버지에게 엄청 맞고 자랐다. 그렇게 반발심도 커졌다. 날 대변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며 꿈이 생겼다. 지금 10대도 마찬가지다. 혼내고 때린다고 비뚤어진 친구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언젠가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사이프러스는 왜 충격이었을까. “놀기 좋아했던 시절이었다. 랩과 거친 리듬 등 모두 멋있게 들려왔다. 그런 음악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들 역시 멋있게 사는 친구들이었다.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그걸로 돈을 벌고. 어느 순간 내게도 비트가 생기더라. 음악을 만들면서 안 자도 졸리지 않고. 한 마디로 미쳐 있었다.” -그래서, 돈은 많이 벌었나. 저작권료 수입도 상당할 것 같다. 연간 얼마나 될까. “흠…. 말할 수 없다. 미안하다. 벌긴 많이 벌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 덕분이다. 처음엔 돈이 중요하지 않았다. 명예를 따르면 돈이 생긴다는 말, 맞는 것 같다. 식을 줄 알았던 열정은 그대로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어딜 놀러 가도 가사 나오면 써야 하고.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음악이 제 삶이 된 것 같다. 없으면 불안하다.” -불안감이 당신을 키웠나. “언젠가는 재능이 바닥날 것이다. 대중의 취향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 젊은 친구들보다 떨어질 거다. 하지만 그건 기술적인 문제다. 멜로디는 그렇지 않다. 지금도 옛날 음악을 듣지 않나. 결국은 나만 갖고 있는 것, 나만의 감성이다. 난 밝은 곡을 잘 못 만든다. 아픔. 이별, 사랑….” -경험인가. “(어릴 적)많이 외로웠다. 친구들은 학교 가고, 내겐 친구가 없었다. 부모님과 사이도 좋지 않고. 혼자 많이 울기도 했다. 선택한 길에 대한 후회였다. 지금도 가끔 운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용감한형제는 자신만의 감성으로 숱한 가수를 스타로 키워냈다. 물론 그 수단은 음악이다. 2004년 양현석의 권유로 YG엔터테인먼트의 작곡가 겸 프로듀서가 된 뒤 빅뱅의 ‘마지막 인사’, 손담비의 ‘미쳤어’와 ‘토요일 밤에’, 씨스타의 ‘니까짓게’ ‘마 보이’,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어쩌다’, 애프터스쿨 ‘너 때문에’, AOA의 ‘사뿐사뿐’ ‘심쿵해’, 포미닛 ‘이름이 뭐예요’ 등을 썼다. 걸그룹의 대표적인 스타들이 그와 함께 일한 셈이다.  



-대중음악의 굵은 흐름을 주도했다. 걸그룹 10년의 역사를 이끌었다.

“렉시의 ‘하늘 위로’로 ‘힙트로닉’, 일렉트로닉과 힙합, 하우스와 힙합을 섞은 장르를 처음 도입했고, 대중음악에 뿌리내렸다. 내 자부심이다. 어떤 시기에는 한 음악순위 프로그램의 10위권에 내 노래가 절반을 차지할 때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표절의 유혹을 느껴본 적은 없나.

“단 한 번도 없었다. 저작권협회에 등록된 것만 400곡이 넘는다. 거기에 내 특유의 음악이 없다? 거짓말이다. 성향이 나올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자기복제 논란도 잠시 벌어지긴 했지만. 부인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으니까.”


-새로움을 찾기 위해, 트렌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

“많이 듣는다. 다른 것 없다. 가리지 않고 다 듣는다.”

노력의 성과는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사업으로 이어졌다. 그는 현재 자신의 예명에서 이름을 딴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를 세워 걸그룹 브레이브걸스를 론칭했다. 동시에 최석원 셰프와 레스토랑을 공동 운영 중이다. 화장품 사업도 있다. 또 미국과 일본 음악시장을 노린 야심찬 발걸음도 이미 뗐다.


-해외 성과가 궁금하다.

“일본에선 올해 5월 걸그룹 첼시를 프로듀싱했다. 미국에서도 프로듀싱 계약을 했다. 엠파이어라는 힙합 전문레이블로, 좋은 아티스트가 섭외되면 프로듀싱하기로 했다. 에릭 벨린저는 이미 녹음을 마쳤다.”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면 자칫 역량이 분산되지 않을까.

“그렇진 않다. 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은 정확히 구분한다. 대부분 나 혼자 하는 일은 아니니까. 그래도 잘 하는 건 프로듀싱이다. 그것만큼은 다른 일 신경 안 쓰고 하려 한다. 클럽을 운영하며, 문화공간으로 키우려 했지만 잘 안 됐다. 대중의 취향도 바뀌고, 음악을 즐기는 문화가 안 되더라. 그래서 접었다.”


-지금 목표는 뭔가.

“아시아 최대의 엔터테인먼트사다. 사실 지금도 알게 모르게 이곳저곳 후원도 하고 있긴 하지만 이후 자선사업을 하고 싶다. 대중의 사랑으로 번 돈을 통해. 30대의 밥차로 매주 4000명에서 5000명, 한 달에 2만명, 1년 24만명에게 밥을 드리고 싶다. 목표에 20∼30%가량 와 있는 것 같다. 5년 안에 이루고 싶다.”

그의 본격적인 첫 작품인 브레이브걸스의 성과는 아직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동안 겪은 우여곡절을 풀어 놓은 그는 “인생을 걸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음악이 삶”이라는 말, 거짓으로 들리지 않았다. “행복할 수 있도록”, 충분한 가능성으로 계속 나아가길 다짐하는 그는 22일 방송을 시작한 엠넷 ‘2016 슈퍼스타K’의 심사위원이다. 그 자격으로 한 말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고언으로 다시 들렸다.

“7명의 심사위원 중 나만이 불합격 선정하는 경우가 많다. 정말 냉정하게 보려 한다.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있도록. 음악이 정말 하고 싶은, 간절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타인의 열정까지 꺾을 수 있다.”


● 용감한형제(강동철)

▲1979년생 ▲10대 중후반 아버지와 불화로 ‘밤골목’ 방황 ▲18살 때 사이프러스 힐의 갱스터 힙합 ‘Hand on the Pump’로 음악에 눈을 뜸 ▲1999년 형 강흑철과 랩 듀오 ‘용감한형제’ 결성 ▲2002년 YG엔터테인먼트 가수로 계약, 데뷔 무산. 홀로 활동 ▲2004년∼2008년 YG 작곡가 겸 프로듀서(빅뱅, 세븐, 거미 등) ▲이후 손담비, 씨스타, 애프터스쿨, 포미닛 AOA 등 대표적 걸그룹 프로듀싱 ▲현재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 대표, 케이블채널 엠넷 ‘슈퍼스타K 2016’ 심사위원

엔터테인먼트부장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