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란 ‘남자사람친구’만 많고 애인은 아직…

신동아
신동아2016-09-22 09: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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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씨름 하자며 덤비는 남자 제일 싫어”
‌‌ “내가 배운다는 마음으로 강단 올라”
 ‘장미란재단’ 통해 스포츠 꿈나무 지원
 “은퇴 후 취미? 역도가 제일 재밌어요”

오랜만에 장미란(33) 선수를, 아니 장미란 교수를 만났다. 2013년 초, 더 이상의 부담과 고통은 안녕이라며 바벨과 작별 인사를 고한 그는 은퇴 후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갔다.

세계선수권대회 4연패,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5년부터 5년 연속 세계 제패. 이 같은 성취를 이룬 역도선수는 장미란이 유일하다. 놀라운 기록을 세운 그는 마지막 올림픽인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바벨에 손 키스를 남기고 전국체전을 마친 뒤 은퇴 수순을 밟았다. 은퇴 후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장미란재단과 학업에 푹 빠져 지냈다. 이젠 ‘교수님’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혹시 사진도 찍나요?
인터뷰 전날인 8월 6일 이런 문자가 왔다. ‘혹시 내일 사진도 찍나요? 제가 어제 장염으로 응급실 다녀왔는데 구토를 심하게 해서 얼굴에 실핏줄이 다 터지고 말았어요. 어쩌죠?’ 난감했다. 주중엔 시간이 없다 해서 주말에 약속을 잡은 건데, 아프다는 사람 앉혀놓고 인터뷰를 강행하는 게 미안했다. 그러나 장미란은 사진 촬영만 거론했지 인터뷰를 못하겠다고 하진 않았다. 미안한 마음을 안고 다음 날 약속 장소에 나갔다.

얼굴을 직접 보니 그가 왜 그런 얘길 했는지 이해가 됐다. ‘얼굴이 많이 상했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안부를 묻자 “제가 은퇴하고 예뻐졌다는 얘기 많이 들었는데, 아프고 나니 이런 얼굴이 됐어요”라면서 웃는다.

3년 전, 자신의 분신과도 같던 바벨을 내려놓은 후 장미란이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체중과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제 체중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람들 대부분이, 심지어 기자들도 은퇴 후에 체중이 얼마나 빠졌냐고 물어봐요. 왜 그게 궁금해요?”

그래서 얼마나 빠졌냐고 묻자, 장미란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얼마 안 빠졌어요. 많이 빠져야 하는데, 잘 안 빠지던데요”라고 답한다.

장미란은 은퇴 후 장미란재단 일에 몰두했다. 2012년 2월, 경기 고양시와 비자카드의 후원으로 발족한 장미란재단은 유소년 스포츠와 사회체육 교육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비인기 종목 선수와 스포츠 꿈나무 지원, 다문화 가정과 한부모 가정 자녀 대상의 스포츠 체험 프로그램 운영 등을 주요 사업으로 한다. 상임이사를 맡은 아버지 장호철 씨의 노력으로 재단의 기반이 잘 다져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미란은 재단 관련 일 중 ‘찾아가는 스포츠 멘토링 교실’에 큰 애착을 가졌다. 전국의 중·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꿈과 비전’에 대한 특강을 열고, 특강 이후에는 그 학교의 운동선수들을 만나 현역 시절 자신의 운동 방법에 대한 노하우를 공유하고 학생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시간을 갖는다.

4개 기록종목 실기 가르쳐
“처음엔 아이들이 쑥스러운지 쉽게 다가오지 못했어요. 제가 눈높이를 낮추고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니까 조금씩 자연스러워지더라고요. 어떤 아이에게 꿈이 뭐냐고 묻자 IOC(국제올림픽위원회) 같은 국제 스포츠 기구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KOC(한국올림픽위원회)는 뭔지 아느냐고 물었죠. 모른다고 했어요. 그래서 대한체육회 홈페이지를 알려주고 거기에서 체육회 조직도를 찾아보라고 얘기해줬어요.


또한 국제 스포츠 기구에서 일하려면 가장 중요한 게 영어가 돼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 꿈을 이루려면 영어는 필수라고 말해주니까 눈빛이 달라지더라고요. 잠시 후 밖으로 나간 아이의 손에 음료수가 들려 있었어요. 고맙다면서 그걸 내미는 아이의 눈빛을 보며 저도 감동했습니다. 따뜻한 격려와 친절한 설명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 같아요. 제게도 배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6월 장미란은 재단 관계자들과 함께 강원도 태백의 철암중·고교를 찾아가 스포츠 멘토링 교실을 열었다. 장미란이 태백까지 방문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학교에서 신축 역도장을 개관한다는 거예요. 있던 역도부도 없애는 마당에 새 역도장을 개관한다니, 어떻게 안 가볼 수가 있나요. 팀을 창단하고, 새 역도장이 마련된다면 어느 곳이라도 찾아가 인사드려야죠. 이럴 땐 제가 은퇴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필요한 곳이 있고, 제게 손을 내밀어주는 곳이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거든요. 태백을 찾았을 때도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장미란은 지난해부터 용인대 체육학과 교수로 강단에 선다. 육상, 역도 등 4개 기록종목 실기를 가르치며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간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생각보다는 제가 배운다는 마음으로 강단에 올라요. 처음엔 학생들 앞에 서는 게 쉽지 않았어요. 매번 똑같은 얘기만 할 수 없으니 다양한 자료를 찾아가면서 수업을 준비합니다. 학생들이 저를 처음 봤을 때는 교수보다는 역도선수 장미란으로 인식했어요. 그래서 사인을 해달라,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고도 했죠. 재미있었어요. 항상 배우는 사람이었는데, 그 반대의 처지가 되니 다양한 느낌을 갖게 되더라고요.”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요”
장미란은 선수 시절부터 은퇴 후 대학 강단에 서고 싶다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고려대 체육교육학과에서 학사과정을, 성신여대 체육과학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고, 용인대 대학원에서 체육학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제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운동선수는 무식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했죠. 운동과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매달렸어요. 체육특기생으로 대학에 들어가긴 했지만, 졸업할 때는 그런 특혜 없이 일반 학생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기에 어려움이 많았죠. 돌이켜보면 참 열심히 살았어요. 운동하느라 시간이 모자란 탓에 공부가 늘 부족했지만, 그때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학교를 다닌 게 목표를 이루게 해줬습니다.”

장미란은 은퇴 후 3년 만에 대학으로부터 월급을 받게 된 소감을 이렇게 말한다.

“은퇴하고 3년간 재단 일에 전념하며 실업자로 지내다 처음으로 직장을 갖게 된 거예요. 안정감이 생기더라고요. 전공을 살려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된 데 감사함을 느낍니다. 박사과정을 준비하면서도 교수직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자리를 잡을 줄 몰랐어요. 도와주신 모든 분께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죠.”

장미란은 올해 스승의 날을 평생 못 잊을 것이라고 한다.

“아직도 ‘교수님’ ‘선생님’이란 호칭이 익숙지 않거든요. 학생들이 스승의 날에 ‘스승의 은혜’를 불러주는데, 그 상황이 너무 쑥스럽고 무안한 거예요. 제가 정말 그 자리에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학교로부터 발령 소식을 전해 듣고 용인대 인근 아파트를 알아보러 다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혼자 살 집을 구한 것이다.

“늘 부모님이 알아서 다 해주셨기에 제가 할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엄마와 집을 보러 다니면서 전세난, 주택난의 심각성을 실감했습니다. 선수 때는 한 번도 제 월급 통장을 본 적이 없어요. 부모님이 다 관리해 주셨고, 그런 데 신경 쓸 여유도 없었고요. 지금은 제가 다 관리해요. 직접 돈을 만지니까 경제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은퇴한 선수들은 새로 배워야 할 게 정말로 많아요.”

용인대 체육과학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스포츠사회학을 전공한 장미란은 전문 분야이자 가장 관심 있는 분야인 ‘국가대표 선수의 은퇴 기대와 심리적 위기감 및 재사회화의 관계’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은퇴 후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국가대표 출신들의 실제 상황과 자신의 경험을 녹여 논문으로 완성했다.

‘여자 헤라클레스’
장미란은 아테네 올림픽(왼쪽)에서 은메달,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동아일보]
“체육인들은 은퇴 후에 뭉치기가 어려워요. 다들 먹고살기 바쁜 거죠. 먹고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선수가 훨씬 많습니다. 사업에 손을 댔다가 사기당하기 일쑤이고, 직장에 취업해도 적응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죠. 얼굴이 많이 알려진 운동선수는 뭔가를 새로 배우기도 여의치 않아요.

그렇다 보니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는 거예요. 주위에 그런 선후배들을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운동선수들에게 은퇴 전에 전문적인 교육을 지원해 주는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아요. 선수들이 운동과 공부를 병행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요.”

그는 이런 현실을 일찌감치 자각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단순히 공부하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대학원 박사과정을 거쳐 대학교수로 새로운 인생을 연 것이다. “역도를 하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인생의 방향이 은퇴 후에도 이어졌다.

장미란은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바벨을 잡았다. 선수로서의 출발은 늦었지만 타고난 신체조건을 앞세워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전국 대회를 휩쓸고 다녔다. 19세이던 2002년 첫 태극마크를 달고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해 75㎏ 이상급(최중량급)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국제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올림픽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첫 출전이었다. 장미란은 최중량급에서 용상 마지막 시기에 10㎏을 늘려 들어 올리는 데 성공한 중국의 탕궁훙에 뒤져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당시 송진가루에 피범벅이 된 장미란의 손이 중계방송 화면에 잡히는 바람에 금메달을 딴 선수보다 더 큰 감동을 선사했고, 그는 아테네 올림픽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장미란은 국제 대회에서 거침이 없었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세계선수권대회 4연패를 달성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여자 헤라클레스’ ‘세기의 역사(力士)’ 등 최고의 찬사가 뒤따랐다.

“스포츠에 ‘혹시나’는 없다”

장미란은 2010년 교통사고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 최중량급에서 인상 130㎏, 용상 181㎏, 합계 311㎏을 들어 올려 1위에 올랐다. 유독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과는 인연이 없던 장미란에겐 여간 값진 금메달이 아니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장미란은 인상 125㎏, 용상 164㎏, 합계 289㎏을 들어 올려 4위에 머물면서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마지막 용상 3차 시기에서 170㎏에 실패한 뒤 장미란은 관중을 향해 큰절을 하고 바벨에 따뜻한 손 키스를 남긴 채 경기장을 떠났다.

“제가 원래 표현을 잘 못해요. 여느 선수들이 쉽게 하는 손 하트도 못 날려요. 그런데 그날은 그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큰절도, 바벨을 향한 손 키스도, 전혀 ‘대본’에 없던 행동이었습니다.

사실 런던 올림픽까지 가기가 정말 힘들었거든요.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어요. 그래도 마지막 올림픽이라고 마음 추스르며 안간힘을 다해 버텼어요. 그러다 마지막 시기에 바벨을 떨어뜨리면서 ‘아, 드디어 끝났구나’ 하는 시원섭섭한 감정이 휘몰아쳤습니다. 그냥 그 자리를 떠나기가 싫었어요. 역도를 통해 얻은 게 너무 많은데 그 마음을 어떻게 해서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바벨에 손 키스를 한 것 같아요.”

장미란은 경기장을 벗어나 대기실로 향하면서 씁쓸한 마음에 헛웃음이 나왔다고 한다.

“연습이 조금 부족했어도 그동안 해온 게 있으니까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연습한 것 이상의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한 거죠. 그런데 역도는 제가 한 만큼만 결과로 나와요. 아주 정직하죠. 그게 스포츠의 매력이기도 하고요.

땀방울의 진가
2013년 1월, 장미란은 은퇴 기자회견을 한다. 쉼 없는 훈련과 부상으로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됐다. “자고 싶을 때까지 편하게 자고 싶다”는 생각에 은퇴를 결심했다는 그는 눈물을 쏟으며 은퇴 기자회견을 마무리했다.

“런던 올림픽에서 4등을 하고 귀국해 양궁 국가대표 박성현 언니와 대형 서점에 간 적이 있어요. 한 여대생이 저를 보고 달려오더니 제 손을 잡고 우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그 학생이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졌냐’는 거예요. 성현 언니랑 저랑 우는 여대생 앞에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그 여대생은 런던 올림픽에 가서 제가 4등 하는 걸 현장에서 지켜봤대요. 제가 경기 후 큰절하는 것을 보고 서럽게 울었다는 얘기도 해줬어요. 제 손을 꼭 잡은 여대생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면서, 제가 해온 역도가 꽤 가치 있는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퇴해도 이렇게 저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후회나 아쉬움 없이 물러날 수 있겠다는 위안이 됐어요.”

장미란은 이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TV로 지켜보는 느낌이 매우 특별하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부터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3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며 올림픽 때마다 현장에서 선수로 뛰었던 터라 TV로 보는 올림픽은 영 낯설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리우 올림픽 개막식을 TV로 보면서 ‘와, 올림픽 개막식이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마지막 성화 봉송 주자를 보며 큰 감동도 받았고요. 선수 생활할 때는 개막식에 참석하는 대신 훈련이나 휴식으로 경기 감각을 끌어올려야 해서 TV로도 개막식은 못 봤거든요. 리우 올림픽은 개막식부터 시작해서 배구, 수영, 사격, 양궁 등 여러 경기를 열심히 챙겨 보고 있어요. 친한 후배들도 있고, 그들이 흘린 땀방울의 진가를 알기에 진심으로 응원도 보냈어요.”

장미란이 여자배구 대표팀의 기둥 김연경 선수 얘기를 꺼냈다.

런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연경이가 코트에서 선수들을 독려하고 에너지 넘치는 플레이를 펼치며 리드하는 모습이 정말 멋지더라고요. 얼마나 긴장될까, 얼마나 힘들까…온갖 감정이입이 되면서 배구 경기를 지켜봤어요. 선수 때는 그런 긴장감이 정말 싫었거든요. 그런데 경기를 보면서 저도 몰래 그 긴장감을 그리워하고 있더라고요.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생겼습니다.”

7월 28일 국제역도연맹(IWF)은 “런던 올림픽에서 채취한 소변, 혈액 샘플을 재조사한 결과 11명의 샘플에서 금지 약물 성분이 검출됐다. 이들 중 6명이 메달리스트”라고 밝혔다. 도핑 양성 반응자 명단에는 런던 올림픽 여자 역도 최중량급에서 동메달을 딴 흐리프시메 쿠르슈다(아르메니아)가 포함됐다. 쿠르슈다의 메달 박탈이 확정되면 장미란은 동메달리스트로 기록된다. 이렇게 될 경우 장미란은 2004년 아테네에서 은메달, 2008년 베이징에서 금메달, 2012년 런던에서 동메달을 따낸 것이 돼 올림픽 금·은·동을 모두 획득한 선수로 올라선다.

“저도 기사를 봤고 기분이 좋았어요. 저도 저지만, 베이징 올림픽에서 체중이 510g 더 나가는 바람에 메달을 놓친 후배 임정화(48kg급)가 그 체급 은메달리스트의 금지 약물 복용 사실이 밝혀지면서 동메달을 받게 됐는데, 그게 더 기쁘더라고요. 올림픽 메달이 하나도 없던 정화에게 늦게나마 메달이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정화와 제가 메달을 받게 됐다는 기사가 나온 뒤 많은 분으로부터 큰 축하를 받았고 ‘한턱 쏴라’고 해서 밥도 많이 샀는데, 아직 연맹이나 IOC로부터 연락이 없어요. 진짜 동메달을 주기는 하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런던 올림픽 때 주위에서 욕심 부리지 말고 동메달만 목에 걸고 오라면서 저를 ‘금동아’라고 불렀어요. 금메달, 은메달은 땄으니 동메달 따라고요. 그 동메달을 이렇게 받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IOC 선수위원 도전
장미란은 지난해 사격의 진종오, 탁구의 유승민과 함께 IOC 선수위원 한국 후보로 나섰다가 유승민에게 밀려 탈락했다. 내심 기대했다가 탈락 소식을 전해 듣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최종 후보에 오른 유승민에게 축하 인사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한국 후보로 선정된 유승민은 리우 올림픽 기간 중 선수들의 직접 투표를 통해 IOC 선수위원으로 당선됐다).

“저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했어요. 영어가 부족하든 뭐든 제가 다른 후보보다 부족한 게 있으니까 안 뽑혔겠죠. 제 능력 밖의 일에 대해 스트레스 받으면 저만 손해잖아요. 상대가 저보다 더 능력이 있다면 그가 올라가는 게 맞아요.”

장미란이 역도를 시작한 계기는 늘어난 체중 덕분이었다. 초등학교 때 체중이 불어나는 것을 보고 역도선수 출신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역기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딸에게 역도를 시키는 아버지가 도통 이해가 안 되던 때도 있었다.

“날씬하고 예뻤다면 악기를 시켰지, 역도를 시키진 않으셨을 거예요. 여자가 역도를 하는 게 너무 창피해서 아빠를 원망할 때도 있었거든요. 어릴 때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아빠를 닮았다’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었죠. 동생들이 부모님의 잘 생긴 외모를 물려받았다면 저는 눈에 안 보이는 체력 조건, 이런 쪽만 닮아서 손해 보는 느낌도 있었어요.”

“제가 그렇게 힘세 보여요?”
조금이라도 더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리고자 억지로 체중을 불려야 하던 시절도 있었다. 세계 최고가 되려면 세 자리 숫자의 체중을 유지해야 했다. 장미란은 어느 인터뷰에서 국내 대회보다는 국제 대회에 참가할 때 마음이 훨씬 편하다고 한 적이 있다. 왜 그런지 물었는데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와 기자를 자지러지게 했다.

“중국의 무솽솽, 탕궁훙 이런 애들을 죄다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어요. 제가 그 친구들 중간에 딱 서 있으면 얼마나 돋보이는데요, 날씬해 보이기까지 하니까.”

은퇴 후엔 바벨을 잡을 일이 없을 줄 알았다는 장미란. 그는 요즘 체력운동을 위해 다시 바벨을 들고 있다.

“탁구도 하고 다른 운동도 해봤지만 역도처럼 효과적인 게 없더라고요. 운동 시간 대비 근력 향상에 가장 뛰어난 운동이 역도예요. 그리고 재미있어요. 선수 시절에는 역도를 재미로 하지 않잖아요. 오로지 기록을 내고자 바벨을 잡았는데 지금은 취미로, 무게 부담 없이 하니까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기가 있느냐고 묻자 장미란은 “지금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게 좋다”고 답한다.

“저도 생각해봤거든요, 만약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느 시기로 돌아가고 싶은지. 없더라고요. 지금은 지금대로, 선수 때는 또 그 나름대로 행복하고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뒤돌아보기보단 매일 열심히 살고 싶어요. 그래야 후회를 안 하죠. 선수 장미란의 모습도 저이고, 은퇴 후의 저도 장미란이잖아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 될 것 같아요.”

아직 ‘남자사람친구’만 많고 애인을 만들지 못했다는 장미란. 이성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다가 그가 예전에 한 말이 떠올라서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아세요? 저를 보자마자 팔씨름하자고 덤비는 사람이요. 제가 그렇게 힘이 세 보이나요?”


‌이영미 | 스포츠 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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