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업일치 시대

동아일보
동아일보2016-09-05 13: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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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 디자이너는 120여 명에 불과하지만 ‘레고 아이디어스’라는 웹사이트를 통해 활동하는 자발적 디자이너가 12만 명에 이른다. 스스로를 레고 디자이너로 칭하는 이 레고 ‘덕후들’은 자신이 조립한 레고 블록을 웹사이트에 올려놓는다. 만약 1만 명 이상의 투표를 받는다면 제품화되어 수익까지 나눠 가질 수 있다. 최근 한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유튜브 스타로 뜨고 나서 자신의 이름으로 만든 화장품까지 시장에 내놓았다. 이세돌과 대국한 알파고를 만든 데미스 허사비스는 열여섯 살 때 게임 회사에 취업해 그 다음 해 자신의 이름을 단 완성도 높은 시뮬레이션 게임을 선보였다. 성공한 덕후라는 의미의 ‘성덕’이자 ‘덕질’과 ‘직업’이 일치되는 ‘덕업 일치’의 사례다.

바야흐로 덕후 전성시대이다. 어느 새인가 덕질 하는 ‘화성인’에서 한 우물 판 전문가로, 능력자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덕후 전성시대이다. 1990년대 ‘오타쿠’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할 때는 물론 최근까지도 ‘덕후’라는 단어에는 부정적 시선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어느 새인가 덕질 하는 ‘화성인’에서 한 우물 판 전문가로, 능력자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덕후에 대한 인식이 변하게 되었을까. 개인 취향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신뢰하는 풍토도 그런 인식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덕후는 나와 비슷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 반전의 쾌감을 준다. 무엇보다 덕후는 실리가 아닌 재미를 추구하기 때문에 이해관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덕후들은 온라인상에서 빠르게 뭉치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 ‘없만갤’(‘없으면 만드는 갤러리’의 줄임말)은 덕후들의 성지로 떴다. 자동차, 에어컨, 전자 액자, 수제 가죽 가방, 피규어 등 분야에 상관없이 무언가 만드는 방법을 공유하며 제작 영상과 제작 후기를 올리고 있다. 몇 해 전 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8개국 덕후들이 온라인상에서 모여 오프닝 곡을 각자의 악기로 연주한 동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로의 덕력을 공유했을 때 시너지를 보여준 것이다. 스스로 콘텐츠 생산자가 된 덕후들이 뭉치자 그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박성연 크리베이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