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1500 대 1 시니어 모델”… 숨겨온 열정이 불붙었다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10-01 08: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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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는 참고사진 ⓒGettyImagesBank
“36년을 나라를 위해 살았습니다. 남은 생(生)은 나를 위해 살고 싶습니다.”

올해 환갑이 된 유효종 씨는 얼마 전부터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6월 퇴직을 한 후 귀찮아서 깎지 않고 두었던 수염이 생각보다 잘 어울려 매일 다듬고 있다. 옛 체신부 시절 공직에 입문해 최근까지 공무원 생활을 한 유 씨에게 수염을 기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튀는 색깔의 옷도 퇴직 전에는 옷장 속에만 넣어두곤 했다. 그런 그가 얼마 전부터 마음 가는 대로 살기 시작했다. 연기가 배우고 싶어 최근엔 연기학원에도 등록했다.



9월 26일 서울 강남구 현대백화점 본점에서 열린 ‘시니어 패셔니스타 선발대회’에서 만난 유 씨는 “시니어 세대로서 사회의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기 위해 계속 도전하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백화점업계 최초로 시니어 모델을 뽑는 이번 대회에는 전국에서 1500여 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모두 1960년 이전 출생자(만 60세)들로 이날은 서류심사, 전화 인터뷰 등을 통과한 18명의 현장 평가가 이뤄졌다. 치과의사, 공무원, 주부 등 다양한 직업과 사연을 가진 시니어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네이비 슈트에 흰 운동화, 메탈 소재 목걸이에 찢어진 스키니진, 여러 개의 의상을 적절히 레이어드한 참가자들의 모습은 흰 머리칼만 빼면 20, 30대 젊은 모델과 비슷했다. 대부분 런웨이에 처음 오른 초보자들이지만 걸음걸이와 표정, 포즈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워킹 테스트 직후 진행된 개별 인터뷰에선 삶의 여정이 묻어났다. 30년 넘게 경찰서에서 행정공무원으로 일한 김경아 씨(61)는 “경찰서에서 여러 사건사고를 접하면서 세상에 나쁜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퇴직 후 다양한 도전을 하면서 세상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밝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올해 70세로 1차 예선 통과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윤영주 씨는 런웨이에서 내려온 후 “흥분되고 짜릿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50대가 넘어 미학 박사학위를 딴 윤 씨는 패션모델을 그 다음 도전 과제로 정했다. 그는 “주변에선 나이를 생각하라고 말하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면서 “70대가 돼서도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는 건 행운”이라며 웃었다. 이날 2차 예선을 통과한 10명은 향후 전문가 심사, 온라인 투표 등을 거치게 된다. 최종 선발된 1명은 상금과 함께 현대백화점 온라인몰 모델로 활동하게 된다.

현대백화점이 처음으로 시니어 모델 선발에 나선 것은 최근 커지고 있는 시니어 시장의 영향이 크다. 일본에 이어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국내 시니어 산업 시장 규모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연구에 따르면 2012년 27조4000억 원 수준이었던 고령화친화산업 시장 규모는 2015년 39조3000억 원으로 커졌으며, 2020년에는 72조8000억 원으로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 백화점이나 온라인 등에서 시니어 고객의 소비 규모는 매년 커지고 있다. 2018년 현대백화점과 아웃렛 패션 상품 구매 고객 중 60대 이상의 매출은 전년 대비 8.5% 늘었다. 같은 기간 현대백화점 온라인몰 더현대닷컴의 60대 이상 고객 매출은 61.3%나 증가했다.

시니어 시장이 커지면서 유통업계의 움직임은 빨라지고 있다. CJ제일제당, 아워홈 등 식품업계는 나트륨이 적고 씹기 편한 식품을 출시하고 있다. 백화점업계도 문화센터 등에 시니어 고객을 위한 강좌를 개설하거나 시니어 타깃 상품군을 강화하는 추세다.

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