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첩보요원-형사 역할… 남성 중심사회에 강펀치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8-03 15: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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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챠플레이를 통해 지난달28일 국내에 공개한 미국 드라마 ‘킬링 이브’는 첩보기관 요원 이브(샌드라 오)와 킬러 빌라넬(조디코머)사이의 추격전과 묘한로맨스가 관전포인트다. 샌드라오는 이작품을 통해 제76회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TV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BBC AMERICA 제공
“미안해. 나도 적응 중이야!”

영국 첩보기관 MI5의 요원이자 백인 남성 빌(데이비드 헤이그)의 이 대사는 상징적이다. 오랜 기간 이브 폴라스트리(샌드라 오)의 상사였다가 부하 직원이 돼 버린 빌은 뒤바뀐 현실이 난감하기만 하다. 이브는 “10년 넘게 밑에서 일해 줬는데, 내가 상관이라고 괜히 자존심 부리는 것 같았다”고 그를 몰아세운다.



지난달 28일 왓챠플레이에 공개된 미국 드라마 ‘킬링 이브’는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깨부수는 시도로 가득 차 있다. 이야기를 이끄는 두 축도 이브와 사이코패스 킬러인 빌라넬(조디 코머)이라는 여성들이다. 남성 장르로 여겨진 첩보스릴러물에서 아시아계 여성 배우 샌드라 오가 주연을 맡은 것도 이례적인 일. 오죽하면 그도 처음 대본을 읽으며 ‘내가 어떤 역할이지?’라며 고민했다고 한다.

‘킬링 이브’에서 남성들은 철저히 이야기의 주변부로 밀려난다. 두 여성을 보조하거나 이들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내가 하는 일을 궁금해 하는 남편 니코(오언 맥도널)에게 이브는 “알아서 뭐해? 내가 지켜줄게, 묻지 마”라고 답하는 ‘나쁜 아내’이고 니코는 그런 그에게 순종적인 ‘현모양부’다. 빌라넬은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섹시녀’나 남성의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청순가련형’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기존 여성의 이미지에 조소를 날리듯 중년 남성들을 잔혹하게 살해한다.

시청자들 가운데는 가부장적인 남성을 향한 냉소를 넘어 여성 우월적 시각을 읽어내는 이가 적지 않다. 이른바 ‘젠더 미러링(mirroring·따라하기)’ 드라마인 셈. 제작자 샐리 우드워드도 본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익숙한 장르를 여성의 관점에서 급진적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적절한 시기에 시대정신이 반영된 드라마”라고 평했다.




포털업계 세 여성의 파워 게임을 다룬 tvN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검블유)’는 불필요한 남성과의 로맨스를 최소화했다. 왼쪽부터 전혜진 임수정 이다희. tvN 제공
런던에 사는 여성의 삶을 다룬 영국 인기 드라마 ‘플리백’에서 주연 및 각본을 맡았던 피비 월러브리지에게 원작 소설을 각색해 달라고 요청한 것도 여성 중심적인 시각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우드워드는 “미투 운동 이전에 아이디어를 발전시켰고 문화적 맥락을 의도적으로 바꾸려하진 않았다”며 제작사나 방송사도 이런 시도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고 전했다.

‘젠더 미러링’은 해외에서 점차 주류가 돼 가고 있다.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MCU) 최초로 여성 히어로가 주연인 영화가 제작되거나(‘캡틴 마블’) 자스민이 술탄이 되고(‘알라딘’) 흑인 여성 배우 러샤나 린치가 007 시리즈 ‘본드 25’의 주인공에 낙점됐다. 25일 종영한 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검블유)’도 포털 업계의 세 커리어우먼이 권력 다툼을 벌이거나 남성 부하 직원의 몸을 성적 대상화하는 등 노골적인 ‘미러링’으로 주목받았다.

영화 ‘걸캅스’ 이성경(왼쪽), 라미란. 두 여성 형사가 주역이 된 영화‘걸캅스’는 일부여성관객들이 표를 여러장 구입해 흥행성적을 올려주자는 ‘영혼보내기’ 운동을 벌여 화제가 됐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물론 논란도 만만찮다. 온라인에서는 페미니즘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이 여성, 성소수자를 앞세운 콘텐츠에 ‘PC(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묻은’이라는 수식어를 달기도 한다. 두 여성 형사가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파헤치는 영화 ‘걸캅스’는 5월 개봉 전 ‘평점 테러’와 함께 성대결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방송영화계에서는 ‘젠더 미러링’ 콘텐츠가 계속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때가 된 거죠.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어요. 그만큼 미디어 속 여성에 대한 무지, 묘사에 변화를 원하고 저항하려는 이가 많다는 뜻이니까요.”(우드워드)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