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 안에서 지쳐 잠든 학생들을 탱크가 짓밟았다” 톈안먼 시위 30주년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6-04 12:12:01
공유하기 닫기
1989년 6월 4일 새벽 4시 중국 베이징 톈안먼(天安門)광장의 불이 꺼졌다. 확성기로 시위대에 대한 소개(疏開)가 시작될 것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팔짱을 꼈다. 학생들 10m 앞에 기관총과 소총을 지닌 군인들이, 그 뒤에 탱크와 장갑차가 서 있었다. 그리고 진압 시작. 당시 시위대 대표 중 한 명이었던 차이링(53)은 “오랜 시위에 지쳐 천막 안에서 깊이 잠든 학생들을 탱크가 짓밟았다”고 증언했다.

▷중국 정부가 1991년 밝힌 톈안먼 시위 진압의 공식 사망자 수는 241명이다. 그러나 당시 베이징과 인근 병원의 진료기록을 집계하면 적어도 478명이 사망하고 920명이 부상했다는 주장이 있다. 국제사면기구(AI)는 사망자가 1000명까지도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지난해(2018년) 비밀해제된 영국의 한 외교기밀문서는 사망자가 1만 명을 넘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살아남은 톈안먼 사태 관련자는 수감되거나 추방됐다. 당시 시위대 대표 중 한 명이었던 왕단(50)은 징역 11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석방돼 치료 목적의 망명을 인정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지식인 대표였던 류샤오보는 망명을 거부하고 중국에 남아 수감과 연금 생활을 이어가다가 2017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은 중국이 출국을 막아 빈 의자에서 이뤄졌다.



▷중국 우주물리학자 팡리즈가 1986년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귀국했다. 그는 중국의 빈곤이 전제적 정치체제와 경직된 통제경제의 산물이라고 봤다. 그의 호소에 학생들이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후야오방 총서기와 자오쯔양 총리는 시위에 유화적이었으나 실권자인 덩샤오핑은 강경한 대응을 주문했다. 세 사람은 마오쩌둥에 같이 저항했으나 그 문제로 갈라섰다.


▷톈안먼 시위는 신해혁명-5·4운동-중화인민공화국 수립-문화혁명-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이어진 중국 현대사의 단절점(斷絶點)이자 그 이후의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다. 덩샤오핑의 의도가 반영된 1989년 4월 26일자 런민(人民)일보 사설은 “20만 명이 죽는다 해도 20년의 안녕을 쟁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톈안먼 사태는 덩샤오핑 이후 중국 체제가 경제적으로 개방을 추구할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독재임을 분명히 했다. 한때 중국 경제가 개방되면 정치적 민주화도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기대가 있었으나 시진핑에 이르러서 거꾸로 집단지도체제에서 단일지도체제로 회귀하면서 그런 기대도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