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론산 바몬드와 바둑학원의 추억

sodamasism2019-06-03 13:5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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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내게 바둑을 가르치고 싶어 했다. 모눈종이처럼 생긴 바둑판 위에 흰돌과 검은돌이 한 수 한 수 신중하게 놓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전략적 사고와 신중한 의사결정, 침착함과 냉정한 승부사 기질… 을 바라셨지만 역시나 그런 건 없었다. 구구단도 버거운 여덟 살에게 바둑은 어려웠다. 자신의 아들이 서른이 넘어서도 눈치를 배우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알았다면 아버지는 바둑학원에 나를 등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바둑학원에 들어왔지만 나는 바둑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흰 돌과 검은 돌이 순서대로 놓이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그곳에 앉아 내가 뭘 배우는 것인지, 배우는 게 있긴 한 건지 알지 못한 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거 하나 마실래?”

바둑학원 선생님이 작은 우유 냉장고에서 음료를 하나 꺼내 주었다. 세상이 끝난 듯 서있는 여덟 살짜리가 아무래도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음료에는 처음 보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구론산 바몬드’

이것은 박카스일까, 쌍화탕일까? 약국에서나 팔 법한 무서운 생김새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이거 마시고 정신을 차리라는 건가?’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당황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그거 먹어도 돼. 맛있는 거야.”라고 안심시켰다.

나는 5초쯤 망설이다 뚜껑을 돌렸다. 지루하기도 하고, 목도 마르고,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마셨다. 한 모금 마시고 별로면 뱉어버릴 거니까.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자 박카스 같은 향기가 났다. 쌍화탕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구론산 바몬드에는 약간 포도맛(?)이 나면서 박카스의 상쾌함이 느껴졌다…라고 하면 오버고. 당시에는 ‘오 이거 맛있어!”라며 박수를 쳤다. 콜라나 스콜 정도가 음료의 전부였는데 처음 먹어본 맛의 음료가 온 것이다. 선생님은 내 표정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물어봤다. “하나 더 마실래?”

바둑학원의 맛을 알게 된 나는 매일 2시간씩 학원에 달려갔다. 그리고 하루에 다섯 병씩 구론산 바몬드를 마셨다. 무제한으로 맛있는 음료를 주는 곳이 있다니! 구론산바몬드를 마실수록 바둑이 즐거웠다. 그렇다. 한 병의 음료가 내게 행복을 가져다준 것이다.

이창호, 이세돌을 위협할 기세로 다니던 바둑학원은 허무하게 중단이 되었다. (아마도) 바둑기사를 향해 나아가던 나의 열정을 어머니가 중단시킨 것이다.

“바둑학원은 이번 달 까지만 하자…”

여덟 살짜리의 행복 아니 대한민국 바둑의 명맥이 끊긴 것에. 나는 엉엉 울었다. 어머니가 미웠지만 결정을 뒤집을 방법은 없었다. 인생의 허무함을 여덟 살에 알게 되다니. 끝내 나는 바둑의 원리를 깨우치지 못하고, 구론산 바몬드의 맛만 배우고 떠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었다. 텔레비전에는 마동석 형님이 구론산 바몬드 광고에 나온다. 나는 어머니께 그때 왜 바둑학원을 그만두게 했냐고 따져 물었다.

“아들, 그때 학원에서 구론산 바몬드 값만 10만원을 냈단다. 학원비보다 음료값이 더 나왔는데 기가 차서…”

아…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학원에 다니는 음료는 무제한이 아니었구나. 자본주의의 맛을 알지 못했던 여덟 살 불효자는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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