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행당한 경찰관 “진압하다 처벌받느니 때리는대로 맞아”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5-24 09: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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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중공업 서울사무소 앞에서 열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산하 금속노조의 집회 현장에서 한 경찰관이 머리 부분을 잡힌 채 집회 참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뉴스1
“혹시 가족 중에 누가 경찰관이 되겠다고 하면 말려라.”

23일 낮 12시경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대 인근 집회 현장에서 만난 경찰관 A 씨는 “가족 중에 경찰관이 없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 대한민국에선 그렇다”며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듯 말했다. A 씨는 전날 종로구 계동 현대중공업 서울사무소 앞에서 있었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금속노조 소속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조합원들의 집회 현장을 지키다 조합원들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조합원들은 이날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해양 인수합병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현장을 지키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저 사람이 대장이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사람들이 달려들어 나를 10여 m 끌고 갔다. 그러곤 수십 명한테 둘러싸여 5분 넘게 맞았다”고 했다. A 씨는 전날 폭행을 당하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발길질도 당했다. 각목으로 머리를 때리는 사람도 있었다”며 “그저 눈을 감은 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의 집회시위 관리 기조는 ‘인내 진압’이다”라고 말했다.

A 씨 얼굴엔 각목으로 맞아 생긴 상처가 선명했다. 오른팔엔 어른 손바닥만 한 시커먼 멍 자국이 있었다. 팔, 다리, 허리에도 멍 자국과 긁힌 상처가 있었다. A 씨는 이런 몸을 이끌고 23일 오전 6시 반부터 다시 집회 시위 현장에 나섰다.






▼ “인내 인내하라고 해… 집회현장 다녀오면 온몸 성한 곳 없어” ▼

“호랑이연고 항상 들고 다녀” 경찰, 연행했던 민노총 10명 석방




“우리가 힘이 없어서 맞겠나. 항상 인권, 인권, 인권이 화두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 진압’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A 씨는 집회시위 현장에서 불법 폭력행위가 발생해도 경찰이 강하게 나서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런 부분이 참 아쉽다”고 했다. A 씨는 “위에서는 불법행위가 발생하면 체포하라고 한다. 그런데 자꾸 인내하라 인내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사람을 체포하나”라며 답답해했다. 또 “경찰한테 집회시위를 평화적으로 관리하라고 하면 집회 참가자들도 평화적으로 집회를 해야 한다”며 “평화 시위가 정착돼야 경찰관들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A 씨는 최근 논란이 된 이른바 ‘대림동 여자 경찰’ 사건이 발생한 뒤 경찰청이 새로 내놓은 현장 경찰관들의 물리력 사용지침을 찾아봤다고 한다. ‘집회 현장에서는 테이저건 사용 제외’라고 돼 있었다. A 씨는 “어떤 상황에서든 ‘무조건 인내하라’고 하는 집회 관리 방침 때문에 때리면 때리는 대로, 집어던지면 던지는 대로 그냥 맞아야 한다. 진압에 나섰다가 처벌을 받을 바에는 그냥 맞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약에 집회 노동자가 (나처럼) 그렇게 둘러싸여 맞았으면 청장 장관 날아갈 거다. 폭행을 당하고도 참을 수밖에 없는 경찰관 심정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A 씨는 무차별 폭행을 당한 22일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소속 경찰서 사무실에서 잤다. 가족이 얼굴과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 놀랄까봐 걱정이 돼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A 씨는 상의 앞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호랑이 연고’였다. A 씨는 몸 곳곳에 난 상처에 이 연고를 바르면서 “집회 현장을 다니다 보면 온몸에 성한 곳이 없다”며 “멍들고 삔 곳에는 이게 만능약이다. 항상 들고 다닌다”며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A 씨는 상처가 다 없어질 때까지 당분간은 경찰서에서 먹고 자고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며칠은 집에 못 들어갈 것 같다. 가족이 걱정할까봐 집에 못 들어가고 사무실에서 자는 게 일이다”며 답답해했다.

A 씨는 집회시위 현장에서 폭행을 당하고 나면 오만 생각이 다 든다고 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나중에는 부끄럽고, 그 다음에는 수치심이 든다”고 했다. A 씨는 집회시위 참가자들에게 맞고 복귀한 날 밤에는 자다가도 화가 치밀어 일명 ‘이불킥’을 하는 일도 있다고 했다. A 씨는 그래도 참을 수밖에 없는 게 지금 한국 경찰의 현실이라고 했다.

A 씨는 22일 계동 현대중공업 서울사무소 앞에서 무차별 폭행을 당하고 난 뒤 자신의 시계와 선글라스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됐다. 그는 “두들겨 맞고 나서 보니 시계도 없고 선글라스도 없더라. 살아서 돌아와 보니 내 상태가 너덜너덜 걸레가 돼 있더라”고 말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22일 현대중공업 서울사무소 앞 집회 참가자 중 민노총 조합원 12명을 연행해 조사했다. 이 중 10명은 23일 새벽 석방됐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