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끊겨 고통받는 어린이 위해 맨홀 뛰어든 ‘로빈후드 추기경’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5-15 13: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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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트 크라예프스키 가톨릭 추기경. 출처=페이스북
5월 11일 이탈리아 로마 도심 거리에서 한 남성이 건물 인근 맨홀 가까이에 다가섰다. 남성은 경찰이 봉인해 놓은 맨홀 뚜껑을 뜯고 성큼성큼 아래로 내려갔다. 손을 더듬어 전기 스위치를 찾아 올렸고 맨홀 옆 건물 복도에는 불이 환하게 켜졌다. 전기가 끊겼던 이 건물에는 100명의 어린이, 청소년 등 450여 명이 살고 있었다. 맨홀에 스스로 들어간 남성은 콘라트 크라예프스키 교황청 추기경(56)이었다.

이튿날 크라예프스키 추기경이 노숙인들을 위해 직접 맨홀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의 반응은 뜨거웠다. 현지 일간 라레푸블리카는 크라예프스키 추기경을 ‘교황의 로빈후드’라며 치켜세웠고 바티칸 신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인류애의 몸짓’이라고 평가했다.



문제의 건물은 국가 소유 건물로 오랫동안 방치돼 있었다. 2013년 10월부터 노숙인들이 빈 건물에 몰려들며 거주하기 시작했다. 사회활동가 등도 이 건물에 관심을 가지며 작은 가게와 공방, 거주공간 등이 만들어졌다. 다만 이들은 전기, 수도 등을 무단으로 사용했고 밀린 공과금만 약 30만 유로(약 4억 원)에 달했다. 무단 사용을 견디지 못한 전기회사는 5월 6일 공급을 중단했다. 건물 거주자들은 냉장고와 온수를 사용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크라예프스키 추기경은 수녀로부터 100여 명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물과 전기가 끊겨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직접 행동에 나섰다.

이탈리아 정부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극우정당 출신 마테오 살비니 내무장관은 “불법적인 일을 지지하는 것은 좋은 행동이 아니다”며 “많은 이탈리아인은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공과금을 낸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바티칸 사람들이 어려운 이탈리아인들을 위해 돈을 낸다면 계좌를 알려주겠다”며 비꼬기도 했다.

살비니 장관은 교황청과 난민 등 소외 계층에 대한 이견을 드러내며 충돌해왔다. 크라예프스키 추기경은 “정치적인 일로 비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서도 “절박한 상황에 놓인 어린이를 위해 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따뜻한 물과 전기를 얻을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며 벌금 고지서를 보낸다면 기꺼이 지불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건물에 다녀간 뒤에는 현재까지도 전기가 공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크라예프스키 추기경은 ‘빈자들의 사제’로 불린다. 밤에는 사제복을 입지 않은 채 하얀 밴을 직접 운전하고 다니며 노숙인들에게 음식을 나눠준다. 교황청 인근에는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 샤워장, 이발소, 진료소 등을 운영한다. 2013년부터 교황청의 자선 업무를 맡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선활동 오른팔’로 불리기도 한다. 크라예프스키 추기경은 폴란드 출신으로 지난해(2018년) 6월 추기경에 임명됐을 때 축하 저녁식사 자리에 노숙인 280명을 초대하기도 했다.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