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속 대통령, 진짜 대통령 됐다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4-23 1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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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디미르 젤렌스키 후보(41)가 대통령이 되면 재앙이 될 가능성이 90% 이상이지만 난 그래도 그에게 투표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사는 간호사 알료나 시치 씨는 4월 21일 대선 결선 투표를 앞두고 영국 일간 가디언에 “진짜 바뀔 가능성 10%에 기대를 건다”며 젤렌스키의 당선을 희망했다. 이런 기대가 현실이 됐다. 22일 오전 개표율 90% 현재 정치 신인 젤렌스키 후보가 73%를 득표해 25%를 득표한 페트로 포로셴코 현 대통령(54)을 물리치며 대통령 당선을 확정지었다.



코미디언인 젤렌스키는 2015년부터 방영된 인기 TV 드라마 ‘인민의 봉사자’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다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교사 역을 맡은 뒤 국민배우로 떠올랐다.

정치, 행정 경험이 없는 젤렌스키는 ‘포로셴코 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엘리트들의 재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뭉쳐진 다른 종류의 포퓰리즘’(유럽 싱크탱크 ECPR)이라는 새로운 유형을 제시했다. 기성 정치에 대한 반감만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경우다.

2017년 당선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젊고 선출직 경험이 없는 정치 신인이긴 했지만 장관 경험이 있는 주류 사회 엘리트였다. 지난해 정권을 잡은 이탈리아 루이지 디마이오 부총리는 감세와 복지 증대라는 포퓰리즘 공약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후보가 대통령 역을 맡았던 텔레비전 드라마 ‘인민의 봉사자’ 포스터. BBC 홈페이지 캡처
젤렌스키는 선거 기간에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 내전 종식, 부패 척결, 물가 상승과 가난 해결을 위한 경제 개혁을 약속했지만 구체적인 정책이나 공약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당선된 것은 구소련 해체 이후 30년 동안 친러시아 혹은 친서방 엘리트들이 집권했지만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빈곤율 30.3%)가 되었고 내전이 이어지는 데 대한 국민 불만이 누적됐기 때문이라고 ECPR는 분석했다.

포로셴코는 21일 투표장에서 “코미디언에게 투표하는 건 그저 웃긴 일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결과만 있을 뿐”이라고 경고했다. 2014년 러시아에 대한 국민의 반감을 자극했던 민족주의 성향의 포로셴코는 이번에도 ‘군대 강화, 우크라이나 언어 회복, 러시아로부터 동방 정교회 신앙 분리’ 등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역외 탈세 등 부패 혐의에 국민은 등을 돌렸다. 젤렌스키는 19일 양자 토론회에서 포로셴코를 향해 “나는 당신이 실수해서 생긴 결과”라며 “나는 정치인이 아니라 시스템을 부수러 온 그냥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의 선거 운동은 소셜미디어 동영상과 개그 공연으로 주로 진행됐다.

21일 출구조사 발표 후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TV 프로그램 ‘인민의 봉사자’ 로고송과 함께 등장한 젤렌스키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어떻게 국가를 운영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