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아이’ 심리치료조차 막는 부모들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4-03 12:00:01
공유하기 닫기
K 군(16)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형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했다. 아버지와 형에 대한 분노는 자해로 이어졌다. 손목이나 허벅지 등에 손톱으로 상처를 자주 냈다. 자해로도 화가 풀리지 않으면 동네 강아지와 고양이를 때리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인 2017년 상담교사는 K 군에게 정신건강의학과 치료와 전문상담이 필요하다고 수차례 권했다. 하지만 K 군의 부모는 거절했다. “가정사가 드러나니 참견 말라”는 게 거절의 이유였다. 이후 K 군의 상태는 더 악화됐다. 수업 중 책상을 뒤엎거나 맨손으로 유리를 깨기도 했다. 상담치료가 필요하다는 학교 측 요구를 계속 무시하던 부모는 지난해(2018년) “대안교육을 받게 하겠다”며 K 군을 자퇴시켰다.





○ “가정사 드러난다” 심리치료 막는 부모들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는 참고사진 ⓒGettyImagesBank
K 군처럼 긴급한 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이 ‘부모의 동의’라는 장벽에 막혀 적절한 조치를 못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학교 측은 ‘위(Wee)클래스’ 등 자체 상담프로그램으로 문제 해결이 어려울 경우 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나 교육청이 지정한 심리치료기관에 학생을 보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부모 동의가 필요하다. 현행법상 보호자 동의 없이는 학생 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없다.

부모들은 상담과정에서 부부갈등, 가정폭력 등의 가정사가 드러나는 것을 우려해 자녀를 치료나 상담시설로 보내는 걸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기록이 향후 자녀에게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거나, 기도 등 종교의 힘을 빌리겠다는 부모도 있다. 곽현정 충남 고위기학생치유센터장은 “자해와 같은 심각한 증상에 대해서도 ‘크면 다 낫는다’며 가볍게 넘기는 부모도 있다”고 말했다.


부모의 방치로 치료시기를 놓친 아이들은 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된 L 양(14)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집단따돌림을 당했다. 가해 학생들과 같은 중학교에 진학한 L 양은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여러 번 자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상담교사는 L 양에게 진료와 상담이 필요하다고 부모를 설득했지만 “아이들끼리 크며 겪는 갈등”이라며 거부당했다. 치료시기를 놓친 L 양은 대인기피 증세를 보이고 환청에 시달리고 있다.



○ 법원 치료명령도 부모가 버티면 속수무책

부모가 의료적 도움이 필요한 자녀를 방임한 경우 아동보호전문기관이나 법원이 강제적인 조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도 부모의 동의 없이는 아동에 대한 상태 조사가 어려워 실효성이 떨어진다.

부모의 반대로 상급 치료·상담시설로의 연계가 막힌 경우 아동보호전문기관은 부모를 상대로 아동 방치 여부를 조사해 수사기관에 신고할 수 있다. 하지만 방임 여부 조사에도 부모의 협조가 필요하다. 장화정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장은 “학생의 정확한 진술, 병원 진료 기록 등 증거가 필요한데 부모가 협조하지 않으면 증거물 수집이 어렵다”고 말했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은 ‘최후의 보루’로 부모 동의 없이도 아동을 병원이나 상담소에 위탁할 수 있게 하는 ‘피해 아동 보호 명령’을 법원에 청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조차도 부모 협조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치료명령을 받으려면 법원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견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부모가 아동을 병원에 데려가는 것부터 반대하거나, 진료기록 제공을 거부하면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다. 곽 센터장은 “자살 시도 등 심각한 증세를 보이는 고위험군 아동에 대해서는 부모 동의 없이도 병원이나 상담센터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박상준 기자 speak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