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자 → 운전자 → 중재자 → 촉진자, 그 위험한 집착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3-25 09:2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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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논설주간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만 바라보지만, 김정은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만 쳐다본다.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의 사슬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꼬이게 만드는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이 3자 중엔 누가 제일 약자일까.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란 말이 있듯이, 당연히 문 대통령이다. 사랑을 주기만 하고 받지는 못하니까.

급기야 김정은은 트럼프와의 실연의 화풀이를 문 대통령에게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제안한 남북 정상회담 제의는 뭉개고,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철수를 일방 통보했다. 지난해 4·27 판문점 합의로 만들어진 연락사무소의 개·보수와 유지 등에 100억 원 이상이 들어갔다. 시쳇말로 ‘돈 주고 뺨 맞은’ 경우다.



북한은 ‘하노이 노딜’ 이후 만만한 남쪽에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다.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15일 기자회견을 열어 “남조선은 미국의 동맹이기 때문에 ‘플레이어’이지, 중재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줄곧 핵문제는 북-미의 문제라며 한국을 왕따시켰던 북한이 한국의 당사자 자격을 인정한 걸까.

천만의 말씀. 북이 말하는 당사국의 정의는 “미국에 대고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할 말은 하는 당사자 역할”(22일 대외선전매체)이다. 쉽게 말해 아예 발가벗고 북쪽 편에 서라는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제재의 틀을 깨고 금강산관광이든, 개성공단이든 자기들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도록 하라는 요구다.

문 대통령으로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주도의 제재 틀을 깼다간 자칫 우리 경제에 치명타를 맞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통해 북한에 무상 공적개발원조(ODA)를 해주는 우회 방안까지 나오는 걸 보면 오로지 북한, 북한으로 향하는 그 집념은 놀라울 정도다.


문재인 정부가 그 집념의 10분의 1이라도 경제 살리기에 썼으면 한다. 하노이에서 트럼프에게 뺨 맞은 김정은의 표정은 막 실연당한 사람 이상으로 반쯤은 넋이 나가 보였다. 그런 김정은에게 애꿎은 분풀이를 당하는 문 대통령도 국정의 활력을 잃은 듯하다. “남북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나머지는 다 깽판 쳐도 괜찮다”고 했다가 정말로 깽판을 쳤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으려는 것인가.

그런데 남북 관계가 동력을 잃으니, 이번에는 친일 논란에 일본 ‘전범 기업’ 딱지, 인천 상륙작전 피해자 보상, 여순 반란사건 재심, 심지어 100년도 훨씬 넘은 동학농민운동 참가자 명예회복까지 과거사 타령이 춤을 춘다. 들여다보면 문재인 정권의 북한 짝사랑과 역사 뒤집기는 샴쌍둥이 같은 것이다. ‘부정한 세력이 지배해온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통성을 부정하다가 대안을 북한에서 찾은 80년대 운동권 논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남쪽에 대한 증오를 워낙 키우다 보니, 북쪽에서 자행된 사상 최악의 독재와 공포정치, 인권탄압, 왕조계승 같은 악행에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고는 남쪽의 ‘불의(不義)한 역사’는 고쳐 쓰고, 북과 손잡아 ‘세상 바꾸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기도가 성공할 수 없을뿐더러 세계 10위권 대한민국을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게 하기보다 자꾸만 안으로, 옛날로 파고들게 만든다는 점이다.

외교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균형을 잡는 예술이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에 이어 문재인 정부의 ‘남북 운전자’, 뒤이은 ‘북-미 중재자’에 이어 ‘촉진자’론까지 모두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바로 이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다. 거창한 동북아 균형자부터 북-미 촉진자까지 그 스케일이 졸아들면서도 어떻게든 북한과의 연계 고리를 유지하려는 그 집착이 안쓰러울 뿐이다.

하지만 그 집착은 허망할뿐더러 위험하다. 북한에 꽂힌 나머지 미국이란 한반도 질서의 상수(常數)를 너무 가벼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워싱턴 조야(朝野)에선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며 자유무역 질서를 지키다가 최대 수혜자가 된 중국이 미국 패권에 도전하는 빌미를 줬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트럼프가 스스로 자유무역 질서를 깨고 ‘세계의 경찰 포기’ 선언을 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미 국방부가 주한미군 예산 8000만 달러가량을 비롯해 전 세계 국방사업 예산을 멕시코 장벽 건설용 전용예산에 포함시킨 것도 심상치 않다. 이런 마당에 70년 혈맹인 미국보다 북한을 중시하는 대북정책을 버리지 않는다면 미국이 한국을 버리는 날만 앞당길 뿐이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