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학당 이살눔, 맨발로 만세 외치며 “여성들이여 동참하라”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3-06 09: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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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을 맞은 3월 1일 김포시 김포아트빌리지에서는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열렸다. 일제의 총칼과 협박에도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했던 선열들의 모습을 되살려냈다. 김포에서는 1919년 3월 22일 월곶면 군하리장터, 23일 양촌면 오라니장터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김포시청 제공
경기 김포시에 위치한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에선 특별기획전 ‘전국에 울려 퍼진 함성’ 전시가 한창이다. 기념관 소장품인 ‘조선총독부 엽서’와 국가기록원 소장 3·1운동 관련 사진 등이 5월 12일까지 전시된다. 시위자 체포 장면, 일제에 의해 파괴된 민가 등 3·1운동 당시의 희생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3월 한 달간 무궁화목걸이, 태극 팽이 등을 만들어보는 체험 행사도 진행된다.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은 한국관광공사가 최근 자녀와 함께할 수 있는 역사여행 코스로 추천한 12곳 가운데 하나다. 추천 목록에는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천안 독립기념관, 백범김구기념관 등이 포함돼 있다.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을 세운 지역은 흔치 않다.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은 김포의 대표적인 만세운동이었던 양촌면 오라니장터 시위와 월곶면 군하리장터 시위를 기억하고자 2013년 양촌읍에 건립됐다. 심영섭 오라니장터3·1만세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신도시의 영향으로 오라니장터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해마다 3·1절이면 독립운동기념관에서 기념행사를 열고 우리 지역에서 울려 퍼졌던 만세의 함성을 되살리며 함께 부른다”고 말했다.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1919년 3·1운동의 전개 과정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진과 관련 자료를 전시하는 특별 기획전 ‘전국에 울려 퍼진 함성’이 열린다. 김포=김동주 기자 zoo@donga.com
○ 맨발로 만세시위를 주도한 만학도 여학생




이살눔(본명 이경덕·1886∼1948)은 서울에서 이화학당에 다니던 33세 만학도 여학생이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뒤 그는 고향 김포 월곶면으로 향한다. 독립선언서 수십 장을 옷 속에 감춘 채였다. 그가 선언서를 각 면의 유지들에게 비밀리에 배포하면서 월곶면 시위가 준비된다. 김포에서의 첫 만세운동이었다.

마침 월곶면에서 교회 조사(助事) 일을 맡았던 박용희도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월곶면 시위로 체포된 농민 성태영의 신문조서에 “경성 기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조선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을 전해 듣고 있던 차…(중략)…장날 주막에서 술을 마시는데 박용희가 와서 ‘독립운동을 하라’고 하여서 나도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의하고…(하략)”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들은 이살눔에게 선언서를 받고 동지들을 규합해 태극기를 만들고 의거할 것을 결의한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에 기록된 3월 22일 오후 2시 군하리 장날 만세운동 장면은 생생하다. 이살눔은 수수깡대에 매단 종이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맨발로 만세를 외치고, 특히 여성들을 향해 만세운동에 참여하자고 부르짖는다. 성태영은 군중에게 “조선독립을 원하는 자는 공자묘(향교)로 모이라”고 외치면서 태극기를 휘두른다. 그는 면사무소 앞의 높은 단 위로 올라가 “우리는 독립을 취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군중을 향해 연설을 한다. 일본 경찰이 달려와서 성태영을 끌어내리려 하자 백일환이 쏜살같이 달려와 일본 경찰의 따귀를 때리고 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총과 칼을 빼앗았다. 일경의 모자는 진흙탕에 굴렀고 무장해제를 당한 꼴이 됐다. 군중들은 이구동성으로 “야, 그것 장쾌하다” “흠뻑 때려라”라고 소리 질렀고 일본 경찰은 혼비백산해 주재소로 도망쳤다.

백일환과 박용희는 군중 수백 명과 함께 주재소와 면사무소로 행진하며 만세를 부른다. 백일환은 주재소 마루 밑에 숨어 있던 조선인 순사보 이성창을 끌어내고는 “너도 조선민족이 아니냐? 조선민족이면 누구나 부르는 독립만세를 불러라”라고 소리친다. 이어 면사무소에 들어가 남아 있던 서기들에게 태극기를 내주면서 “만세삼창을 부르라”고 주문했다. 면 서기들이 차례로 만세를 외쳤고, 군중들은 환호하며 같이 만세를 연호했다. 다음 날 ‘매일신보’에는 군하리에서 400여 명이 시위했고 주모자를 검거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그해 경성지방법원에서 성태영과 백일환은 각각 징역 1년형과 2년형을, 이살눔은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다. 만세를 주도했지만 일제에 체포되지 않았던 박용희는 중국으로 망명해 농장을 경영하면서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월곶면에 세워진 ‘월곶면민 만세운동 유적비’도 그날의 함성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월곶면의 만세소리는 3월 22일 하루만 울리고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일주일 뒤인 29일 다시 한번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교사 임용우, 잡화상 최복석, 농민 윤영규 등이 주도해 조강리와 갈산리 일대에서 벌인 시위다. 특히 임용우는 자신의 직장에서 만세운동을 이어간다. 4월 9일 당시 경기 부천군에 속해 있던 덕적도의 명덕학교의 운동회에서다. 덕적도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열린 운동회에는 마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임용우는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오라니장터의 만세운동을 기리는 ‘양촌 대곶면민 만세운동 유적비’. 김포=김동주 기자 zoo@donga.com
○ 일경의 협박에도 시위를 주도한 훈장 아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뒤 양촌면 누산리에 살던 서당 훈장 박승혁은 일경의 협박을 받는다. 경성제1고보에 재학 중이던 아들 박충서가 3월 1일 종로, 덕수궁 대한문, 남대문 등을 돌면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박승혁은 상경해 아들 박충서를 고향으로 데리고 온다.

귀향한 박충서는 일제의 압박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는 삼촌 박승만, 친지 안성환과 전태순 등과 함께 독립운동과 시위 계획을 논의했다. 이들은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모이라’는 내용의 통문과 비분강개한 격문을 작성해 양촌면 각지에 배포한다. 시간은 3월 23일 오후 2시, 장소는 양촌면 오라니장터였다. 수천 명이 모여든 오라니장터에서 박충서는 가슴 속에 태극기를 품고 모여든 군중을 향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주도한다.


두 시간 뒤 오라니장터에서는 다시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번엔 대곶면 초원지리에서 서당을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치던 정인섭과 친구 임철모가 주도한 시위였다. 이들은 광목을 사다가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 위에 정인섭이 먹으로 ‘독립만세’라고 썼다. 다음 날 정인섭은 오라니장터의 군중들을 향해 “우리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외쳤다.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주재소로 향했고, 시위가 계속되면서 군중이 불어나고 형세가 험악해졌다. 일제 경찰은 “즉시 해산하여라. 계속하면 체포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선두에 선 정인섭은 응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다 체포됐다.

박충서와 정인섭이 오라니장터 시위를 사전에 함께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잇달아 벌어진 만세운동은 그만큼 독립을 향한 주민들의 바람이 뜨거웠음을 보여준다. 오라니장터 인근에 세워진 양촌 대곶면민 만세운동 유적비는 이곳의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비다. 김포시독립기념관도 이곳에서 멀지 않다.

3·1운동 뒤 일제는 민심을 무마하고자 문화통치로 방향을 전환했다. 김포의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응에서 이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김포 군수가 시위가 심한 곳을 직접 찾아가 군중을 설득했고, 김포공립보통학교에서 잠시 귀향한 청년들을 대상으로 청년강화회를 개최하는 등 청년 지도에 적극 나섰다.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검사국에 송치된 학생의 부친이 선처를 요청해 무죄 방면시켰다는 사례를 보도하며 학생들이 잘못을 뉘우치면 방면해줄 수 있음을 대외적으로 알리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일종의 회유책이었다.

김진수 김포3·1만세운동연구소장은 “김포의 만세운동은 이살눔과 박충서 등 서울 3·1운동에 직접 참여한 지식인 학생들이 주로 주도했다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군하리장터와 오라니장터의 시위는 격문을 쓰는 사람, 격문을 배포하는 사람, 태극기를 휘두르는 사람, 시위대 선두에 서서 주민을 선동하는 사람 등으로 나뉘었는데, 이렇게 역할을 분담해 치밀하게 진행된 것은 서울의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조직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다. 또 판결문과 자료에 따르면 시위의 주도적 참여 연령층은 20, 30대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젊은 만세운동’이었던 셈이다.

김포=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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