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 年1조 아끼는 ‘전자문서 확대 법안’ 1년 넘게 국회서 낮잠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2-18 09:5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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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 을왕동 왕산해수욕장 인근 ‘왕산마리나’에는 요트를 정박할 수 있는 ‘ㄷ’자형 수상 계류장이 있다. 최대 266척을 세울 수 있지만 14일 본보 기자가 방문했을 때는 불과 수십 척만 정박돼 있었다. 해안가와 가장 가까운 36척 규모 요트 대여업체 전용 계류장 요트는 4척뿐이었다. 요트 대여업은 요트 계류장을 빌려 요트 면허가 없는 일반인에게 1, 2시간씩 요트를 빌려주는 사업이다.

요트 계류장 대여가 뜸한 이유로 왕산마리나 측은 마리나항만법 규제를 꼽았다. 요트 대여업을 하려면 계류장을 최소 3년간 임차해야 한다. 하지만 업체 측은 “요트 한 척을 정박하는 데 3년간 약 4000만 원이 들고 보통 2, 3척을 운영하는 만큼 3년간 고정비용만 1억 원 안팎”이라고 설명했다.



마리나업계는 임차 기간을 정해둔 규정을 없애는 규제완화를 정부에 요구해왔다. 주무 부처인 해양수산부는 지난해 6월까지 마리나항만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법안 발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업계 관계자는 “실생활과 밀접하지 않다는 이유로 정부에서도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이달 13일 장애인영문증서를 떼려고 서울 영동포구의 한 주민센터를 찾은 이용석 씨가 휠체어를 탄 채 센터 정문을 열고 있다. 장애인단체는 2016년부터 정부에 온라인 발급을 건의했지만 지금까지 관련 구제가 풀리지 않고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 현장 따로, 규제혁신 따로




지난해 1월부터 정부는 전기차 충전소에 옥외 광고를 허용하는 규제개혁을 추진했다. 전기차 보급률이 낮은 상태에서 충전소만으로는 사업성이 없으니 옥외광고로 업체들의 투자 부담을 줄여주려는 취지였다. 이 옥외광고 허용 목표시한은 당초 지난해 말이었다. 주무 부처는 산업통상자원부였지만 지자체 조례를 개정해야 한다는 이유로 중간에 행정안전부로 담당이 바뀌었다. 아직까지 지자체 표준조례안이 법제처 심사를 거치지도 못해 실제 시행일을 예측하기 어렵다.
규제개혁이 늦어지면서 업계에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한 충전소 업체 관계자는 “이미 충전소가 앱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어 옥외 광고를 해봤자 효과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정책이 급변하는 산업을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 제도를 바꿨을 때는 무용지물이 되는 셈이다.

병원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 진료기록 사본을 온라인으로 발급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규제개혁안은 현장을 감안하지 않은 추진체계 때문에 제도만 덩그러니 있을 뿐 소비자 편익과는 거리가 멀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말 의료법 시행규칙을 개정했지만 정작 온라인 발급이 가능한 의료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 시한 넘긴 과제 32% 국회서 발목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추진 중인 전자문서법 개정안은 영문 장애인증명서 온라인 발급, 진료기록 사본 온라인 발급 등 온라인 문서발급 체계에 일대 변화를 몰고 올 법안이다. 지금은 정부가 인정하는 전자문서를 61종으로 일일이 제한하는 방식이어서 나머지 문서는 온라인 발급이나 활용이 원천 봉쇄돼 있다. 정부는 일부를 뺀 모든 전자문서를 인정해주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바꾸려 한다. 그러면 종이문서 보관 등에 소요되는 비용이 연간 1조1000억 원 절감될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정부는 이런 전자문서법 개정안을 2017년 12월 국회에 냈다. 하지만 개정안은 보안 관련 논란에 파묻혀 1년이 넘도록 공전 중이다.

실제로 정부가 정한 규제혁신 완료 시점이 지난 과제 225건 중 32.8%(74건)는 현재 국회에서 대기 중이다. 신체 이식이 가능한 장기, 조직의 종류를 손과 팔, 폐 등으로 확대하려는 장기이식법은 지난해 6월 국회에 제출됐지만 감감무소식이다.

‘재(再)제조 제품’ 관련 규제도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재제조란 이미 사용한 제품을 다시 조립해 예전 성능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자원을 재활용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어 2010년경부터 중소기업 위주로 재제조 제품 품질인증 품목을 늘려달라고 요구해왔지만 10년 가까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 끊기 힘든 ‘그림자 규제’가 된 행정규칙



규제를 풀어야 하는 정부 당국이 규제 혁신에 가장 소극적이라는 데 문제의 근본 원인이 있다. 정부는 12개 규제혁신과제 분야를 분류하고 있다. 이 가운데 행정규칙 정비를 뼈대로 하는 ‘행정조사 혁신방안 과제’는 192건으로 전 분야 가운데 가장 많다.

일례로 복지부는 지난해 3월까지 요양기관 현장조사 전 해당 기관이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을 기존 3일에서 7일로 늘리겠다고 했다. 단순한 일정 조정 작업인데도 ‘요양기관이 조사를 방해할 수 있다’는 논란이 제기되자 개편작업이 중단됐고 현재는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정부는 유해화학물질 취급 연구실을 과기정통부와 환경부가 모두 점검하는 중복 규제를 지난해 6월까지 풀기로 했다. 하지만 정부는 개정안을 국회에 내지도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앞서 12일 1만6000여 개에 이르는 행정규칙 정비를 지시했다.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장병규 위원장은 17일 청와대가 페이스북에 게시한 인터뷰 영상에서 “장차관들이 신경 쓰는 규제들은 개선되지만 실제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는 원인은 더 자잘한 규제들”이라며 깨알 같은 규제가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의 규제개혁 방식인 규제샌드박스와 관련해 “지금 신청된 개수 대비 통과된 개수가 미흡하다”며 일단 다 통과시켜주는 것이 기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이새샘 iamsam@donga.com / 인천=송충현 / 세종=김준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