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양 한복판에서 영어 ‘열공’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2-17 11: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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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첫 배를 탔는데 사우디아라비아의 얀부와 라스타누라를 왕복하는 배였다. 고국 소식이 너무도 궁금하던 차에 외국 방송 듣는 법을 알게 됐다. 통신국장이 나를 부르더니 통신실에서 단파방송을 들려줬다. 잡음 탓에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었다. 영어 방송도, 우리말 방송도 있었다. 미국에서 내보내는 방송이 인도양에서도 들리다니. 국장은 “단파에 목소리를 실으면 전리층에서 반사가 반복돼 멀리서도 들린다”고 원리를 설명했다. 

이후 나는 아예 카세트 기능이 있는 단파용 라디오를 사서 소중한 애인처럼 항해 때마다 가지고 다녔다. VOA 방송의 영어 뉴스를 녹음해 내용을 받아썼다. 그런 다음 반복해 들었다. 몰랐던 단어를 찾아 익히길 반복했다. 당직을 마치고 쉬는 시간의 대부분을 여기에 투자했다. 뉴스에 사용되는 단어는 되풀이되는 특징이 있었다.



2년 정도 되니 영어 방송을 거의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가 됐다. 뉴스를 요약해 선원실에 붙여서 선내 소식지를 만들기도 했다. 1983년 9월 1일 발생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도 단파방송으로 내가 가장 먼저 듣고 선원들에게 알려줬다. 새 소식을 전해주는 3등 항해사인 나의 인기가 많이 올라갔다.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는 참고사진 ⓒGettyImagesBank
영어에 자신이 붙은 나는 미국에 상륙하면 중고서점에서 쉬운 영어책을 몇 권씩 구입했다. 승선하는 12개월 동안 당직 후 영어책 6, 7권을 읽고 하선했다. 이 중에는 ‘제3의 물결’ ‘뿌리’ ‘존 F 케네디 대통령 자서전’ 등이 있었다. 책을 사면 즉시 첫 장에 구입한 곳, 날짜를 꼭 적어뒀다. 그 기록이 언제, 어디를 다녀왔는지 젊은 시절로 나를 데려간다. 당시는 외국에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아 귀국할 때 선물과 진귀한 것을 사다 날랐는데 지금 곁에 남은 것은 60권 정도의 영어책뿐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윈스턴 처칠의 ‘영어권 민족사’ 전집 네 권을 모두 모은 것이다. 1989년 미국 찰스턴 중고서점에 갔는데 4권이 있어서 아주 싸게 얼른 샀다. 이듬해 캐나다 밴쿠버에서 1, 2권을 구입했다. 3권이 없었다. 책방 주인은 자기로서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나는 이 항구 저 항구 들를 때마다 3권을 찾으려고 중고서점을 다녔다. 번번이 실패해 포기하려던 찰나, 1992년 호주 시드니에서 그 책을 찾았다.


이렇게 모은 영어책 60여 권의 첫 장을 열면 모르는 영어 단어를 적은 종이 한 장이 나온다. 간단한 독후감도 적혀 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면서도 게으름피우지 않고 열심히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취미는 교수가 된 다음에도 계속되었는데, 외국에 나갔다 돌아올 때 책 두 권을 꼭 사온다. 다만 항해할 때와 차이가 있다면, 교수가 된 지금 구입한 책은 완독하지 못하고 책꽂이에 꽂혀 있다는 점이다. 방학 때 읽자고 각오를 다지지만 언제나 다시 다음 방학을 기다리게 된다. 공부도 때가 있다는데. 20대, 그리고 승선 생활 때만큼 좋은 시기도 없는 것 같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전직 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