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20장 분량의 연극 대사… 배우들은 어떻게 다 외우지?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2-13 12: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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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 연극 ‘대학살의 신’에서 알랭을 연기하는 남경주의 대본, ‘레드’의 켄을 맡은 김도빈의 대본, ‘자기 앞의 생’에서 ‘로자’를 연기하는 이수미의 대 본. 배경 지식이 필요한 단어, 문장과 관련된 내용은 물론 대사의 강조점, 감정 표현을 쓴 글도 있다. 국립극단·신시컴퍼니 제공
연극배우들이 80∼140분 동안 무대에서 끊임없이 쏟아내는 대사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최근 공연을 했거나 개막을 앞둔 4개 작품의 대본을 분석한 결과, 배역에 따라 개인당 A4용지 20장 분량으로, 8000자가량의 대사를 소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대 배역의 대사까지 다 암기하는 경우 분량은 A4용지 35장, 4만 자까지 늘어난다. 지문을 제외하고도 60장(A4용지)을 넘기는 작품도 있다.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대사를 소화하기 위해 처절할 정도로 온갖 노력을 다 하고 있다. 연극 ‘대학살의 신’의 최정원(50)은 “배우들이 모여 대본을 리딩한 내용을 녹음한 뒤 차 안이나 집에서 무한 반복해 듣다 보면 상대 배역의 대사까지 암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같은 작품에서 남편 역을 맡은 남경주(55)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대본을 외우는 건 중요한 무대 위 약속”이라며 “다만 글자, 단어에 집중하기보다 대본의 중요 내용을 형광펜으로 표시하며 상대 배우와의 대사 호흡을 생각하는 게 암기에 더 효과적이다”고 말했다.



대사량이 많기로 유명한 연극 ‘레드’의 김도빈(37)은 “아내에게 상대역 연기를 부탁한 뒤 그 앞에 서서 연기를 펼치며 도움을 받는다”며 “암기가 약한 편이라 대사보다는 상대 배우와의 상황을 먼저 외우는 방법을 택했다”고 했다. 연극 ‘오이디푸스’에서 크레온 역을 맡아 오랜 시간 무대를 누비고 있는 최수형(40)은 “동선이 많은 역할이다 보니 대사 중간중간에 움직일 타이밍과 쉬어갈 음절, 동선까지 대본에 필기하는 방식으로 대사를 숙지한다”고 밝혔다.

대사를 외우는 데 ‘왕도는 없다’는 베테랑 배우도 많다. ‘레드’에서 약 20쪽 분량을 소화하는 정보석(57)은 “딱히 다른 방법 없이 자연스레 대사가 나올 정도로 그냥 달달달 외운다”며 “외울 때 대본에 뭔가 썼다가도 금세 지워 대본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편”이라고 했다.

2월 22일 개막하는 연극 ‘자기 앞의 생’에서 로자 할머니를 연기하는 양희경(65)은 “다 외워질 때까지 무조건 반복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같은 역을 맡은 이수미(46)는 “선배들에게 대본 빨리 외우는 방법을 묻곤 하는데 뾰족한 대답을 못 들었다. 머릿속에서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장면, 장면을 떠올리며 반복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어 “30년 이상 무대에 오른 선배들 가운데는 뇌가 적응해 대본을 카메라로 찍듯 ‘캡처’하는 분도 있는데 피나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