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처가? 설날 어디부터 가셨나요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2-07 12: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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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는 참고사진 ⓒGettyImagesBank
《‘엄마 아빠는 지금 뭐하고 계실까?’

이번 설날 아침에도 저는 이 생각을 하며 시댁 차례상을 차렸어요. 벌써 9년째 자식도, 손주도 없이 친정 부모님 둘이서만 보내는 설날 아침을 생각하면 절로 죄송해지는 못난 딸이랍니다.



저희 집은 딸만 둘이에요. 언니는 외국에서 일하고, 제가 결혼한 뒤로 명절은 늘 부모님 두 분이서 지내시죠. 남편 집은 아들만 둘이고 아버님이 맏형이라 친척들이 많이 모여요. 맛있는 음식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댁 풍경을 볼 때마다 ‘한 해 정도는 우리 없이 차례를 지내셔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난해(2018년) 추석 때 남편에게 물었죠. “내년 설엔 우리 집 먼저 갔다가 설 다음 날 시댁에 가면 안 될까? 나도 사촌들 집에 가보고 싶어. 우리 아이가 엄마 쪽 친척은 아무도 모르잖아.” 그랬더니 남편은 “엄마한테 그 얘기를 어떻게 꺼내느냐”며 손사래를 치더군요. 많이 섭섭했어요. 한국에서 명절에 처가를 먼저 가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요?》

지난해 초 결혼한 직장인 강모 씨(30)는 이번 설을 앞두고 아내와 부모님 사이에서 속앓이를 많이 했다. ‘설 당일을 누구 집에서 보낼 것이냐’가 문제였다.


“아내가 외동딸이고 장인이 안 계셔서 아내는 이 문제에 굉장히 민감해요. 결혼 전 ‘명절은 번갈아 가자’고 약속했죠. 작년 설은 저희 집에 먼저 갔으니 이번엔 장모님 댁에 먼저 가려 했어요. 저도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반대할 줄은 몰랐어요.”

강 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갓 결혼했는데 며느리 없이 설을 보내란 말이냐”며 “명절 당일엔 시가에 있는 게 며느리의 도리”라고 잘라 말했다. 강 씨는 “결혼 전엔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보수적인지 몰랐다”며 “처가를 먼저 오긴 했는데 마음도 불편하고 뒷감당도 두렵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의 성평등 의식이 높아지고 저출산으로 자녀가 한둘에 그치는 집이 늘면서 명절 당일 시가에 먼저 가는 일이 집안 내 갈등의 소재가 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와 달리 이제는 아들과 딸이 시가와 처가의 유일한 자식이다 보니 ‘나도 명절에 우리 부모님을 챙기고 싶다’는 아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설을 앞두고 동아일보 기자 8명이 기혼 남성 100명을 상대로 ‘설날 당일 처가에 먼저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21명이 ‘그렇다’고 답했다. 40, 50대에서는 ‘본가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동선상 편해서’가 처가에 먼저 간 주된 이유였다. 20, 30대에서는 ‘결혼 전 번갈아 가기로 약속해서’, ‘아내가 외동이라서’라는 답이 많았다. ‘올해 설날 아침도 처가에서 보낸다’는 남성은 11명이었다. 10명 중 1명꼴인 셈이다.

3개월 전 결혼한 주모 씨(29)는 결혼 전에 명절 때 ‘본가-처가 교차 방문’을 사전 승낙 받은 경우다. 설날 아침에 한 해는 본가를 먼저 가고, 다음 해는 처가를 먼저 가기로 한 것. 이번 설은 결혼 후 첫 명절이라 본가를 먼저 갔지만 내년 설에는 처가를 먼저 갈 예정이다. “결혼 전 아내가 ‘명절에 친정 부모님이 우리만 기다릴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같은 자식으로서 공감이 돼 사전에 부모님께 ‘번갈아 가겠다’고 양해를 구했어요.”


하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부계 중심 유교문화’가 강하다. ‘명절날 처가 먼저’ 얘기를 꺼내는 게 아들로서는 쉽지 않다. 직장인 정모 씨(34)는 지난해 설에 결혼 후 처음으로 본가 대신 처가에 갔다가 1년 내내 엄마로부터 ‘아들 키워봐야 소용없다’, ‘며느리한테 잡혀 산다’는 핀잔을 들었다. 그는 “분란을 줄이기 위해 지난해 추석부터는 다시 본가에 먼저 간다”고 했다.

아내의 불만을 누르고 매해 본가에 먼저 간다는 박모 씨는 “아내가 어떤 대목에서 예민해질지 알 수 없어 나도 본가에 있는 내내 아내 눈치를 살핀다”며 “명절 목표는 최대한 빨리 본가 방문을 끝내고 처가에 가는 거다. 나도 이런 명절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회사원 심모 씨(40)는 본가 부모님의 배려로 다툼을 줄일 수 있었다. 심 씨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부모님이 ‘연휴 때 내려오려면 힘드니 우리가 올라가겠다’며 설 전 주말에 다녀가신다”며 “엄마가 서운한 기색 없이 ‘차례 음식을 안 하니 나도 편하다’고 말해줘 고마웠다”고 말했다.

김모 씨(36)는 ‘제3의 길’을 택했다. 그는 “설 전에 본가와 처가를 모두 다녀온 뒤 연휴에는 아예 아내와 둘이 여행을 간다”며 “의외로 본가가 이렇게 하는 편을 덜 서운해한다”고 전했다.

오윤자 경희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명절 갈등을 줄이려면 먼저 부부가 감정이 아닌 사실 위주로 소통해 방문에 대한 원칙을 정하고 부모님께 이를 잘 설명해야 한다”며 “시부모 역시 이런 변화를 ‘권력의 이동’이라고 받아들일 게 아니라 같은 가족인 며느리와 사돈에 대한 배려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또 “젊은 세대가 명절 변화를 원한다면 그 전에 더 자주 찾아뵈어 부모님의 ‘빈 감정 계좌’를 채워드려야 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며 “그래야 부모님이 명절 변화를 오해하거나 서운해하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임우선 imsun@donga.com·김자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