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일가 거의 전멸”… 일제, 시위뒤 열사가족 집중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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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2019-02-06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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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의 서대문형무소 수감 시절 모습(왼쪽)과 천안 아우내장터에 세워진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서울에서 공부하던 유관순 열사는 고향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제안했다. 천안=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지 ‘정신문화연구’ 최신호에는 1919년 7월 9일 충청남도장관 구와바라 하치시가 조선총독부에 올린 지역민심 동향보고가 등장한다. 

“천안군 동면 용두리 유관순 일가는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으로 처분돼 일가가 거의 전멸하는 비참한 지경에 빠졌다”는 내용이다. 이는 일제가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의 만세시위 뒤 유관순 열사 가족들의 동향을 집중 사찰했음을 보여준다. 유관순 열사(1902∼1920)가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주요 인물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사료이기도 하다.



유관순 열사의 활약은 경성복심법원의 판결문과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조병호 김교선의 회고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조병호는 “서울 가서 공부하던 유관순 양이 갑자기 지랭이골로 내려왔다. 유관순 양은 서울의 독립선언 준비 소식을 가져와 우리 고을에서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의논했다는 것이다”(신동아 1965년 3월호)라고 술회했다.

유관순 열사는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만세를 부르다가(김교선의 회고), 헌병대의 발포로 부친 유중권이 쓰러지자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로 향한다. 그는 주재소의 헌병들을 향해 “우리는 나라를 찾기 위하여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왜 무기를 사용하여 우리 민족을 죽이느냐”라고 외친다(‘독립운동사―3·1운동사’). 이어 유관순 열사가 주재소장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행동은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에 2회 언급됐다. 이 장면은 천안 유관순열사기념관에도 재현돼 있다. 유관순 열사는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으로 체포돼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며 고문을 받다 옥사(獄死)했다.

2018년 3월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간과된 여인들’이라는 제목의 기획으로 유관순의 부고기사를 싣고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을 소개한 뒤 “유관순은 한마음으로 자유를 열망하는 나라의 얼굴이 됐다”고 전했다. 조국의 독립을 향한 선조들의 뜨거운 열망과 희생이 해외에도 널리 알려진 것이다. 동아일보는 충남도와 유관순 열사의 모교인 이화여고와 함께 2001년부터 유관순상을 제정해 국가와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 여성이나 단체에 시상하고 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