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반, 아이 데리러 가는 덴마크 직장인들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1-31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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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인터뷰를 마쳐야 할 것 같아요. 아들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야 할 시간이거든요.”

지난해 10월 30일 덴마크 스뫼움 시의 보청기 기업 오티콘에서 만난 토머스 젠슨 씨(44)는 덴마크 직장인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다가 말을 멈췄다. 시계는 오후 2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아이를 데리러 간다고?’ 어리둥절한 기자를 앞에 두고 젠슨 씨와 그의 동료들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그때 깨달았다. 워라밸 취재를 위해 제대로 찾아 왔음을….





● 오후 3시 반 ‘퇴근 러시아워’




동아일보 워라밸 특별취재팀이 세 번째로 찾은 곳은 ‘휘게(Hygge)’의 나라 덴마크다. 휘게는 장작불 옆에서 코코아를 마시는 것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상태를 뜻하는 덴마크어다. 옥스퍼드사전은 2017년 휘게를 ‘올해의 단어’ 후보에 올렸다. 지난해 유엔 세계행복지수에서 156개국 중 3위를 차지한 덴마크 시민들의 행복은 휘게로 상징되는 워라밸에서 비롯된다.

젠슨 씨를 따라 나서니 1시간 전만 해도 한산한 도로에 차량이 가득했다. 보육시설에 맡긴 아이를 데리러 가는 직장인들의 러시가 시작된 것이다. 덴마크 근로자 대다수는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3~4시에 퇴근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덴마크 임금근로자의 연평균 근로시간(2016년 기준)은 1416시간으로 한국(2052시간)의 3분의 2 수준이다.



젠슨 씨가 회사에서 차로 15분가량 떨어진 민간어린이집에 들어서자 세발자전거를 타던 세 살배기 아들이 달려와 안겼다. “오늘 뭐하고 놀았느냐”는 젠슨 씨의 질문에 아이는 “핼러윈이라서 피망에 얼굴을 그렸다”고 했다. 젠슨 씨 부부는 맞벌이다. 부부가 모두 늦게 퇴근하면 장모에게 아이를 부탁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한 해 동안 3, 4번에 불과하다고 했다. 부부가 모두 늦게 퇴근할 때가 거의 없단 얘기다.




● “직원이 출퇴근시간 정하면 충성도 높아져”



오티콘 사의 글로벌 프로그램 매니저인 키어스튼 슈미트 씨(50·여)는 시차 때문에 저녁에 해외 파트너와 화상회의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자기가 원하는 날 대휴를 쓴다. 반대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 때문에 일찍 퇴근할 일이 생기면 필요할 때 초과근로를 한다. 상사가 일일이 근로시간을 세지 않는다. 슈미트 씨는 “근로자에게 업무 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정할 재량을 주면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진다는 게 경영진의 오랜 믿음”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회사가 직원을 믿고, 직원이 그 믿음에 부응하는 자율적인 탄력근로 문화가 덴마크 워라밸의 핵심이다. 덴마크 정부는 일률적으로 근로시간을 정하거나 탄력근로의 범위를 법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각 사업장에서 노사가 협의해 최적의 방안을 찾을 뿐이다. 덴마크는 유럽 경영대학원 인시아드 등이 21일 발표한 ‘인적 경쟁력 지수’ 중 노사협력 부문에서 125개국 중 4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120위에 그쳤다.

덴마크의 제약사 노보노디스크에서 일하는 이탈리아인 알랑 프루에이티 씨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데, 덴마크처럼 워라밸을 중시하는 곳은 처음”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한 제약사에서 일할 땐 상사가 퇴근하기 전까지 부하직원들은 자리를 지켜야 하는 불문율이 있었다고 한다.


몇 해 전 지금 일터로 옮긴 뒤로는 삶의 질이 달라졌다. 오후 4시면 퇴근해 여덟 살 아들과 공터에서 축구를 즐긴다. 그는 “‘내가 평생 아이와 이렇게 사이가 좋았던 적이 있나’ 싶다”며 “이곳에서 내가 만약 상사에게 ‘퇴근해도 되냐’로 물으면 아마 ‘내가 당신의 시간을 대신 관리해줄 수 없는데 그걸 왜 묻느냐’고 반문할 것”이라고 웃었다.



● 덴마크 남성의 집안일 시간, 한국의 4배

지난해 11월 2일 오전 8시경 코펜하겐 시 북쪽 외스터 파이막스거드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는 등교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로 붐볐다. 자전거 보조의자에 아이를 태우거나 손을 잡고 걷는 등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눈에 띄는 건 아이의 등교를 책임지는 부모의 성별이었다. 20분간 지켜보니 아이와 동행한 어른 중 남성이 54명, 여성이 65명으로 비슷했다. 인근 공원에서 유모차를 끄는 젊은 남성을 만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덴마크에선 이처럼 남성이 육아 부담을 나눠지는 게 자연스럽다. OECD에 따르면 덴마크 여성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4시간 3분으로 한국 여성(3시간 47분)과 16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반면 덴마크 남성은 하루 평균 3시간 3분을 가사노동에 사용해 한국 남성(45분)의 4배가 넘었다.

노보노디스크의 부사장 메데 애트룹 씨(48·여)는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저녁을 자녀와 함께 먹는다. ‘저녁은 가족과 함께 먹는 것.’ 애트룹 씨가 ‘휘게’를 위해 다짐한 원칙이다. 의사인 남편과 육아를 평등하게 분담하고, 저녁식사 준비도 하루씩 번갈아가며 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애트룹 씨는 “남편과 짐을 나누는 덕에 육아 부담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 초등 ‘돌봄 절벽’ 이겨낸 덴마크…학업보다 ‘사회적 교육’에 초점 ▼



미취학 아동에 대한 정부의 보육 서비스는 한국이 덴마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한국에선 어린이집 비용을 전액 정부가 대준다. 이용시간도 원칙적으로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7시 반까지 하루 12시간이다.

덴마크에선 공립어린이집 비용이 월 평균 1만4892크로네(약 253만 원)에 이른다. 지방자치단체가 75%를 대준다고 해도 3723크로네(약 63만 원)를 부모가 부담해야 한다. 이용 시간도 오전 6시 반부터 오후 4시 반까지 하루 10시간이다.

하지만 한국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돌봄 절벽’이 생긴다. 2017년 기준 국내 초등학생 267만 명 중 초등 돌봄교실 등 공적 돌봄 서비스를 이용한 어린이는 33만 명(12.5%)에 불과했다. 참여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28.4%)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반면 덴마크엔 이런 ‘돌봄 공백’이 없다. 초등학생의 돌봄 참여율이 63.5%(2016년 기준)로 OECD 회원국 중 1위이기 때문이다. 특히 저학년(6~8세)의 돌봄 참여율은 76.7%로 OECD 평균(34.1%)의 2배가 넘는다. 돌봄 교실에선 학업보다는 ‘사회적 교육’에 초점을 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보육교사인 ‘페다고’가 학급마다 1명씩 배정돼 아이들을 인솔하고 안전 관리를 책임진다.

그런다고 아이들이 정규 수업을 마친 후 해가 기울 때까지 학교에만 있는 건 아니다. 돌봄 참여 시간이 주당 평균 9시간 12분으로 OECD 평균(9시간 36분)보다도 짧기 때문이다. 즉, 직장 내 워라밸이 지켜지면서 정규 수업 후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생기는 ‘돌봄 공백’이 그만큼 짧다는 의미다. 많은 아이들이 보편적으로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는 이유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이런 덴마크의 초등 돌봄 시스템을 참고해, 국내 초등 돌봄 참여 학생을 2022년까지 53만 명 수준으로 늘릴 계획이다. 하루 4~5시간에 불과한 정규수업 시간을 6~7시간으로 늘리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덴마크는 2014년 교육 개혁을 통해 초등학교 저학년의 정규 수업 종료 시간을 낮 12시 반에서 오후 2시로 늦췄다.

코펜하겐·스뫼움=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