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사람?” 그림이 답해주다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1-19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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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새로 사귄 한 친구는 그림으로 사람의 속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심리 상담가의 딸로 태어나 자연스레 터득한 기술이라 했다. 내게도 해주겠다기에 집으로 초대했다. 일대일로 했다간 나를 다 들킬까 겁나 동네 친구들을 불렀다. “그림은 무의식을 반영하는 좋은 수단입니다. 무의식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은 알아주지 않으면 계속 커져요. 스스로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저의 역할입니다.”

본격적인 ‘그림 심리검사’가 시작됐다. 집, 나무와 비 오는 날의 내 모습을 그려 보라 했다. 그림은 각양각색이었다. 비를 맞으면서 웃는 사람, 온화한 표정을 짓는 사람, 우는 사람도 있었다. 중간중간 그는 질문했다.



“이 비는 언제부터 왔나요? 얼마나 오고 있죠? 언제쯤 그칠까요?”

비는 힘든 상황을 의미했다.

“A 씨는 스트레스를 즐기는 스타일이군요? 자극 없는 상황을 못 견뎌 하고요. 요즘 삶의 활력이 있으신가 봐요?”


“어떻게 아셨죠? 친구들이 저보고 쾌락주의자래요.”

그는 부업으로 음식점 오픈을 앞두고 있는 금융권 종사자였다. 어떻게 병행 가능한지 의문이지만, 요즘 신나게 일한다. 신발에 조금 젖을 정도로 비가 오고 있지만 기분은 좋다고 말한 그답다.

“성은 씨도 자극을 좇지만 방식이 다르네요. A 씨는 자극을 느끼는 주체로서 그 상황에 뛰어드는 반면 성은 씨는 자극 주는 사람들을 곁에 두기 좋아해요. 적극적으로 쟁취하기보단 지켜보고 열광하죠.”

그랬다. 인생의 많은 순간을 팬에 머물러 있는 건 창작자로서 취약점이었다. 잘나가는 동종 업계 친구들을 보면 부러움에 발을 동동 굴러도 모자랄 판에 제일 앞에 가서 박수 치는 게 나다. 근데 그게 그림에 드러난다고?

저 멀리 거대한 주상복합아파트가 있고 강 건너 작은 집에 살며 행복해하는 나,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자라나는 작은 나무, 비 오는 날 친구들은 비를 맞고 있는데 혼자 카페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


“삶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 명확하시군요. 강 건너 불구경!”

나는 얼굴이 빨개져 웃었고, 친구들은 웃겨서 웃었다.

20대 땐 한 가지 인생만 생각하고 달렸다. 하지만 본격 ‘먹고사니즘’의 세계에 진입해 보니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지금은 촬영 편집 일을 하지만, 몸이 약해질 날을 대비해 작가를 준비해 볼까?’ ‘독립해서 살아보니 요리도 적성에 맞아.’ ‘요가 강사 자격증이라도 따놓을까.’

하지만 이런 인생이 더 불안하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도 많다. 최근에 읽은 올리버 색스의 ‘고맙습니다’의 영향이 크다. 자신의 나이를 주기율표와 연관시켜 인식했던 이 남자는 열한 살 때 ‘난 나트륨이야(나트륨은 주기율표의 11번째 원소다)’라고 말했고, 일흔아홉 살인 지금 ‘나는 금이다’라고 했다. 매년 새로운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여든 살의 일기는 우리를 다시금 꿈꾸게 한다. 이미 다 아는 ‘내 마음’이라 생각했는데, 누가 알아봐 주니 이리 좋다.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