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사람 친구’를 꿈꾸다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1-15 09:2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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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비록 부귀한 형편은 아니지만, 이미 풍부하고 아름다운 자태와 높고 뛰어난 재주가 있어서 항상 가난하고 천한 처지의 벗을 사귀어 죽을 때까지 잊지 않기를 원해 왔습니다.” ―고전소설 ‘포의교집’ 중에서

남자와 여자는 사랑하는 사이를 뛰어넘어 벗의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시쳇말로 여자에게 있어 ‘남자 사람 친구’를 구하는 일은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이런 물음에 답해 줄 조선시대의 여인이 있다.



나이 열일곱 초옥은 하층민이지만 시와 문장을 잘 짓고 학문 실력을 갖췄으며 상층사회의 여성의식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는 궁녀였으나 속량(몸값을 치르고 노비의 신분이 풀림)되어 양 씨 집안의 며느리가 됐다. 초옥의 미모에 대한 칭송은 자자했고, 어느 누구도 감히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했다.

반면 마흔이 넘은 사내 이생은 좋은 집안 출신의 양반이었으나 재주도 없고 성실하지도 않았다. 그는 벼슬을 얻고자 서울에서 남의 집에 의탁하던 중 행랑채에 사는 초옥을 만나 아름다움에 반한다.

초옥은 늘 기개가 있고 문장을 잘하는 남자를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현실은 그와 반대였다. 그런 초옥의 눈에 물 긷는 하인들에게 호령하는 이생이 들어왔다. 초옥은 이생의 호령을 사내의 기상으로 느꼈으며, 이생의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안 순간 그만큼 문장을 잘 할 것이라고 여긴다. 이때부터 초옥의 적극적인 애정 표현이 시작됐다. 이생을 향해 꽃을 꺾어 던지며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초옥은 이후 이생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마이웨이’를 걷는다. 이생이 신분이 미천한 자신과 진심으로 문장을 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옥이 이생과 연을 맺는 것은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생은 어린 아내를 두고 있었고 초옥 역시 남편이 있었다. 이 때문에 초옥은 남편에게 죽을 정도로 구타를 당한다. 초옥이 주변의 평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면서까지 이생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초옥의 소문을 들은 기생들은 초옥이 보잘것없는 선비와 몰래 사귀면서 스스로 정절 있는 행동이라 하는 것에 의문을 표한다. 이에 초옥은 대답한다.

“언행이 비록 칭찬받기에는 부족하지만 또한 정절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뜻이 변치 않는 까닭에 그 행동이 비록 동떨어진다 해도 본래의 뜻을 이을 수 있고, 말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까닭에 섬기는 바가 비록 그르다 해도 또한 하늘의 도를 어기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초옥은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평생의 지기(知己)라 결정한 사람에게 절의를 지켰기 때문에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초옥의 굳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생과의 관계가 자신이 원했던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이생은 초옥이 바라는 관계를 들어줄 위인이 못 되었다. 초옥의 굳은 마음까지도 의심했기 때문이다. 이에 초옥은 이생과의 인연에 연연해하지 않고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떠난다.

조선시대 남녀 사이에서 ‘사람 친구’의 관계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기지우(知己之友) 관계를 바탕으로 한 초옥의 적극적인 애정관계는 보수적 사회 속에서 시대를 앞서간 것임에 틀림없다. 

임현아 덕성여대 언어교육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