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아빠 용서? 선처편지 쓴 소녀는 마냥 울었다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1-14 09:50:28
공유하기 닫기
자료사진 출처 | ⓒGettyImagesBank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법원은 왜 형을 깎아주는 거죠?”

김민주(가명·18) 양은 자신을 성폭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던 아버지가 2018년 2심에서 7년형으로 감형됐다는 소식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아버지는 김 양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2009년부터 수년에 걸쳐 딸의 몸을 만지고 성폭행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딸이 법원에 보내온 편지를 보고 피고인에 대한 형을 줄여주기로 결심했다”며 형을 선고했다. 판결문에도 피해자가 피고인의 선처를 탄원하는 의사를 재차 밝힌 점을 참작했다고 적시했다. 하지만 편지의 내용은 김 양의 진심이 아니었다. 가족들의 집요한 회유를 못 견뎌 억지로 쓴 편지였다.



○ “너만 눈감아주면…” 가족 회유에 굴복


김 양과 같은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은 재판부에 피고인에 대한 선처를 바라는 편지를 내거나 가해자를 면회하는 등 얼핏 합의한 것으로 비칠 수 있는 행동을 한다. 친족 성폭력 범죄는 2013년 6월 친고죄 조항이 폐지돼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처벌해야 하지만 법원은 피해자가 선처를 바랄 경우 이를 양형 요소로 반영한다.

서울고법은 2015년 동거녀의 10대 세 자매를 성폭행한 남성에 대해 1심(징역 7년)보다 감형된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가 가장 컸던 큰 언니가 처벌 불원 의사를 밝힌 점을 참작했다.

전문가들은 친족 성폭력 피해자의 합의 의사는 다른 가족에 의해 ‘오염’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어머니와 자매 등 밀접한 관계에 있는 가족들이 회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너만 눈감아주면 다른 가족들이 잘살 수 있다”, “아빠가 돈을 벌어야 너와 동생들이 대학에 간다”는 말들이 자주 동원된다. 가해자 없이 생계유지가 어려운 가정의 피해자들은 그런 요구에 굴복하기 더 쉽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증오와 애착이 얽힌 양가감정과 더불어 가정을 파탄 냈다는 죄책감까지 느낀다. 몇 달 전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 A 양(17)은 “오빠를 용서했다”며 재판부에 오빠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A 양은 이후 심리 치료 과정에서는 억눌린 분노와 억울함을 드러내며 오열했다.



○ “감형편지 배제해야” vs “무시할 수는 없어”


친족 성폭력 피해자의 처벌 불원 의사를 판결에 반영할지를 놓고, 성폭력 전문가와 법원의 시각은 다소 엇갈린다. 이명숙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장은 “미성년 피해자가 많아 다른 가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원칙적으로 피해자의 합의 의사를 양형요소로 반영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조현욱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은 “피해자가 진정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문제조차 삼지 않았을 것”이라며 “피해자의 선처 편지로 실제 감형이 이뤄져선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법원은 피해자의 의사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는 자세다. 유독 친족 성폭력 재판에서만 합의를 배제하는 것은 법리적으로 타당하지 않고, 피해자가 진심으로 처벌을 원하지 않을 경우 그 의사가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재판부도 양형 조사관, 피해자 변호인 등에게 피해자 의사 확인을 요청하는 등 편지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밝혔다. 또 다른 부장판사는 “피해자 보호기관과 전문 상담사가 피해자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해 법원에 전달하는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은지 eunji@donga.com·이지훈·고도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