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석희 피눈물… “폭로땐 운동 끝장” 침묵의 카르텔을 흔들다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1-10 09:57:15
공유하기 닫기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는 참고사진 ⓒGettyImagesBank
“내가 성폭력을 당해도 섣불리 얘기하기는 힘들 것 같다. 새로 들어간 팀이라면 나오면 되지만 보통 한 팀에서 오랫동안 배우기 때문에 코치들이 부모님과도 친한 경우가 많다. 그 종목에 있는 한 어떻게든 마주치게 된다. 누가 당하더라도 쉽게 얘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의 성폭행 내용이 불거진 1월 9일 서울의 한 대학교 체육관. 오후 훈련을 준비하던 여대생 선수 A 씨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터질 것이 터졌다는 분위기다. 서울의 한 여대에서 선수를 지도하고 있는 B 교수는 “올 것이 온 건지도 모른다. 한국 스포츠의 구조적인 한계 속에서 성폭력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었으나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젊은 빙상인 연대’도 이날 성명을 내고 “과연 심석희 선수 혼자만이 성폭력의 피해자이겠는가”라며 “심석희 선수를 제외한 다른 선수들도 빙상계 실세들의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에 시달려 왔다”고 주장했다.

선수와 지도자들이 함께하는 장기 합숙 훈련이 많고 일대일 지도방식이 필요한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할 소지는 늘 있어 왔다.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에 접수된 성폭력 신고 상담 건수는 2014년 57건에서 지난해 93건으로 63.2% 늘었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성폭력 피해 경험 비율도 2016년 1.5%에서 지난해 1.7%로 늘었다.


최근에는 선수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선수의 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한 지도자는 “지방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는 아들을 따라 간 어머니들을 술자리나 노래방에 불러 성희롱, 성추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국내 스포츠 현장에서는 성폭력으로 고통받았다는 목소리가 간간이 나오긴 했어도 연쇄적인 ‘미투 운동’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운동선수들은 학창 시절부터 운동 하나에 인생을 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운동 말고는 다른 진로를 찾기 힘들기 때문에 진학이나 취업을 결정짓는 성적이나 기록을 좌지우지하는 지도자의 눈 밖에 날 언행을 자제하게 된다.

국가대표 선수들도 진로가 불투명하기는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대한체육회 2017년 조사를 보면 국가대표 경력이 있는 은퇴 선수 중 자신의 전공을 살려 스포츠 관련 업종에 재취업한 사람은 10명 중 2명 정도(22.7%)밖에 되지 않았다. 많은 선수가 은퇴와 동시에 버려지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어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

최준서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운동 외에도 ‘플랜 B’가 있다면 미투 운동이 확산됐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며 “처음부터 퇴로가 막혀 있는 상황에서 선수들이 지도자를 상대로 싸우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이 같은 폭로나 고소, 고발에 가해자들이 보복하기는 어렵지 않다. 출전 기회를 주지 않거나 경기력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방법이 주로 쓰인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선수들의 인권 및 성폭력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선수들이 지도자들에게 인격적, 정신적으로 지나치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희암 전 연세대 농구부 감독은 “운동선수에게 다양한 직업 교육의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독일과 호주는 운동선수들에게 고등학교 때부터 직업 교육 및 진로상담을 실시하고 훈련 및 경기로 인해 빠진 수업은 철저하게 보충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동안 대한체육회가 성폭력 가해자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을 해온 점도 문제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구제명 징계가 자격정지로 줄어들기도 했고 중앙단체와 지역단체를 오가는 방법으로 계속해서 자리를 보존하는 체육단체 간부도 있었다.

해외에서는 스포츠계의 성폭력에 대해 훨씬 엄격하게 대처하고 있다. 래리 나사르 전 미국 체조대표팀 주치의가 어린 여자 선수 156명을 지속적으로 성폭행한 사건은 미국 전역을 분노하게 했다. 법원은 징역 175년을 선고했다. 나사르를 고용한 미시간주립대는 약 5000억 원을 내고 피해자들과 합의했으며 당시 총장이 사퇴했다. 제대로 관리 감독을 하지 못한 체조협회는 미국 올림픽위원회에서 협회 자격을 박탈당한 후 1120억 원대의 보상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2018년 12월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이원주 takeoff@donga.com·김종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