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한기 모르는 ‘농부작가’… “못 쓴 이야기 너무 많아요”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1-10 09: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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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안녕하시다’의 주인공 성형은 왕을 보필하겠다며 3번 가출한 성석제 작가의 먼 조상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그는 “성형처럼 이름 없이 역사의 주요 대목에서 활약한 인물을 오래전부터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현대는 움직이는 과녁 같아서 계속 변화해요. 역사는 고정돼 있지만 관점에 따라 달라지죠. 역사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작업에 매력을 느낍니다.” 무표정을 모르는 듯 사라지지 않는 미소. 줄줄이 달려 나오는 이야기보따리. 1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에서 만난 소설가 성석제(59)는 의인화한 그의 작품 같았다. 이 시대 만담꾼인 그가 5년 만에 장편소설 ‘왕은 안녕하시다 1, 2’(문학동네·작은 사진)를 펴냈다. 그는 “2003년부터 역사에 관심을 가진 뒤로 각종 사료와 논문을 파고 한학자인 외숙부로부터 개인 교습도 받았다. 이젠 통성명만 해도 가문 내력부터 떠올릴 정도로 ‘와이어링(동기화·일체화)’이 됐다”고 했다. 》

이번 작품은 조선 숙종 대를 배경으로 한다. 내키는 대로 살던 파락호(난봉꾼) 성형이 고귀한 세자(숙종)와 의형제를 맺으며 벌어지는 활극을 그렸다. 실제 인물과 사건을 소재로 한 왕실 권력 다툼 등이 큰 줄기다. 그로선 2003년 장편 ‘인간의 힘’, 2006년 단편 ‘집필자는 나오라’에 이은 세 번째 역사소설.



“두 편의 역사소설에 등장한 주인공들이 한 작품에 나온다고 상상을 해왔어요. 이번 작품이 그 결과물입니다. 역사라는 1%의 뼈대 위에 99%의 허구를 더해 당대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했죠.”



‘왕은 안녕하시다’는 읽다 보면 페이지마다 장르가 바뀌는 기분이 든다. 심장 쫄깃한 미스터리부터 장쾌한 무협활극, 농염한 연애소설까지 넘나든다.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 같은 역사서와 ‘인현왕후전’ ‘박태보전’ 등 당대 문학을 쫄깃한 질감으로 뒤섞었기 때문이다.


“작품 곳곳에서 다양한 레퍼런스(참고문헌)를 인용했어요. 치열하고 아름다운 조상들의 문장과 결기 어린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당대가 지금보다 우월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작가는 저열하고도 고귀한 인간을 포용의 문장으로 품어야 하니까요.”

전작인 ‘투명인간’(2014년)은 사실주의 측면이 강했고, 2007년 작 ‘도망자 이치도’는 활극 분위기가 더 짙었다. 이렇듯 온도 차는 있지만, 그의 작품은 이름을 모르고 봐도 티가 난다. 비극 속에 빛나는 웃음과 페이소스가 성석제의 ‘브랜드’다.

“능소능대하게 진지와 웃음을 오가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됩니다. 제가 잘 웃는 편이기도 해요. 어릴 때 고모 누나 여동생 등 여성이 많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항상 시끌벅적하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죠. 그 영향도 있지 싶어요.”

이제 막 책이 나왔건만 작가는 벌써 새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또 한 번 역사소설에 도전한다. 고구려에서 시작한 승마 기술인 ‘박차(拍車)’가 주요 소재다. “역사 속에서 인간성, 삶의 진실한 면모 등을 살피는 작업에 요즘 매력을 느낍니다. 어릴 적 한문에 능했던 할아버지와 책 읽던 기억 때문일까요, 허허.”

그는 농한기 없는 ‘농부작가’란 별명을 지녔다. 쉼 없이 다작(多作)해서다. 요즘 50, 60대 문인들의 작품을 만나기 어렵다는 문단의 평가를 슬쩍 흘려봤다. 그는 “나이가 들면 자연인으로서 정신적 근력이 감소한다.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환갑을 바라보는 농부작가도 지치기 시작했을까.


“글쎄요. 여전히 숨 쉬고, 혈관에 피가 흐르고, 추위와 더위를 느끼고…. 살아 있다는 게 좋아요. 못 가본 곳도, 만나지 못한 사람도, 못 쓴 이야기도 너무 많습니다. 계속 나아가서 언젠가는 ‘이제 그만 써도 되겠다’는 지점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