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혼 깨웠다!’ 베트남이 ‘박항서 매직’에 열광하는 진짜 이유

sportsD@donga.com2018-12-26 09: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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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응우옌띠엔링(23번·오른쪽 세 번째)이 12월 25일 하노이 미딘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북한과의 평가전에서 후반 9분 선취골을 넣은 뒤 동료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사진출처|SBS스포츠 방송 화면 캡처
패배를 모르는 팀이 됐다. 베트남 박항서호의 전진이 계속되고 있다.

베트남은 성탄절 당일인 12월 25일 하노이 미딘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북한과의 친선경기에서 1-1로 비겼다. 후반 9분 상대 골키퍼와 단독 찬스를 놓치지 않은 응우옌띠엔링이 골망을 흔들었으나 경기종료 10여 분을 남기고 북한 정일관에게 동점골을 허용했다.

베트남 박항서(59) 감독, 최근 북한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김영준(35) 감독의 남북 사령탑 벤치 대결로도 관심을 끈 이날의 평가전은 다음달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열릴 2019 AFC 아시안컵에 대비하고 연중 내내 지속된 축구 열기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베트남축구협회(VFF)가 기획한 ‘크리스마스 이벤트’였다.

단단한 수비, 효율적이면서 빠른 역습으로 무장한 베트남은 이로써 A매치 17회 연속 무패(9승8무)를 달렸다. 박 감독은 이 중 11경기를 소화해 6승5무를 거뒀다. 전날(24일) 사전기자회견에서 “스즈키컵에 출전한 주력들에게 최대한 휴식을 부여 한다”며 체력안배에 초점을 뒀음에도 베트남이 훨씬 인상적인 플레이를 했다. A매치 17경기 연속 무패는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기록으로 2위는 2018러시아월드컵 챔피언 프랑스(15경기)다. 역대 최장기간 무패는 스페인과 브라질의 35경기.

베트남이 큰 폭의 성장을 시작하고 부정적인 인식을 무너트린 건 2018년 1월이다. 당시 중국에서 열린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U-23) 챔피언십. 베트남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준우승을 차지했다. 베트남에선 평생 보기 어려운 함박눈을 펑펑 맞아가며 우즈베키스탄과 치른 연장혈투까지 사력을 다한 자국 선수들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벅찬 감동에 젖었다.

대회를 마치고 돌아와 이런저런 행사에 참석한 박 감독을 만난 베트남정부 고위관료들이 잊지 않고 한 질문이 있었다. “부임 3개월 만에 도대체 어떻게 팀을 바꿔놓았나?” 그들은 한결같이 “이제야 베트남정신이 살아났다”며 만족해했다.
당시 ‘베트남정신’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박 감독은 제자들에게 물었다. 어느 날의 선수단 미팅에서다. 베트남선수들은 4가지를 언급했다. “어른들로부터 항상 들은 이야기는 ‘매사 자존감을 잃지 않고 단결하며 가진 역량을 발휘하고 불굴의 투지로 임하라’다.”
취임 첫 선수단 상견례에서 “모두가 하나로 뭉치자”며 ‘원 팀’을 강조했던 박 감독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이야기는 없었다. 한 번 자신감이 붙자 거칠 것이 없었다. U-23 대표팀은 2018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AG)에서도 베트남 사상 처음 4강에 올랐다. 2회 연속 금메달을 목에 건 대한민국 김학범호에 밀려 시상대에 서지 못했지만 충분히 값졌다.

뒤를 이은 ‘형님’들의 퍼포먼스. A대표팀도 폭풍처럼 진군했다. ‘동남아시아 월드컵’으로 불리는 2019 스즈키컵에서 10년 만에 정상에 섰다. 자국 대표팀이 출전한 주요 국제대회 때마다 놀라운 응원 열기를 발산했던 베트남국민들은 스즈키컵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감동은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베트남의 축구성지가 된 하노이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박항서’를 먼저 언급했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저 한국인이란 이유로 과분한 관심을 보여줬다.

현지의 한 TV 방송기자에게 물었다. ‘베트남에서 축구와 박항서는 어떤 존재냐’는 우문에 기가 막힌 답이 돌아왔다. “박항서 축구가 잠자던 베트남의 혼을 흔들어 깨웠다.” 내셔널리즘과 뗄 수 없는 관계인 축구를 통해 자극받고 깨어난 민족성. 올해 초 U-23 챔피언십을 마치고 박 감독이 정부 인사들로부터 들었던 ‘베트남정신’을 많은 이들이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베트남인들의 애국심은 대단하다. 자긍심과 자부심도 넘쳐난다. 당대 최강 프랑스, 미국과 전쟁에서 지지 않은 역사도 분명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지 문화와 관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해온 박 감독은 일찌감치 이를 간파했다. “그라운드에서는 모든 걸 쏟고 적과 두려움 없이 치열하게 부딪히라”고 주문했다. 이렇듯 리더 지시를 120% 이행한 자국 선수들에 대해 또 다른 현지 기자는 “스즈키컵에서의 베트남은 늑대와 같았다”고 느낌을 털어놓았다.

베트남사람들은 ‘박항서 매직’의 끝과 정점을 궁금해 한다. 물론 지금까지의 결실이 자국 축구의 한계가 아니라고 믿는다. 더 높은 곳, 새로운 세상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확신하는 모습이다. 하노이에서 확인한 박항서 감독에 대한 굳은 신뢰와 베트남축구의 도전정신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노이(베트남)|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