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몰카’에 빠져드는 이유

주간동아2017-08-14 10: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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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착실히 공부에 매진해 입신(立身)에는 성공했지만 양명(揚名)은커녕 오명(汚名)만 뒤집어쓰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공무원 및 전문직의 몰래카메라(몰카) 범죄 이야기다. 최근 공공장소에서 상대방의 동의 없이 신체 일부를 몰래 찍다 경찰에 적발돼 망신당한 고위층 인사가 증가했다. 특히 이들 중에는 몰카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법조계 인사도 포함돼 충격을 더한다.

7월 17일에는 현직 판사가 서울지하철 열차 안에서 여성의 신체를 몰래 찍은 혐의로 경찰에 붙잡히는 사건이 있었다. 서울지방경찰청 지하철경찰대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재경 지방법원의 A판사를 조사한 뒤 검찰에 송치했다고 21일 밝혔다. A판사는 17일 오후 10시쯤 서울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과 동대문역 사이를 지나는 열차 안에서 앞에 서 있는 여성의 신체를 자신의 휴대전화로 몰래 촬영한 혐의를 받고 있다.

성범죄 전담 판사가 몰카를?

경찰은 몰카 촬영 행위를 목격한 한 시민의 도움으로 A판사를 체포해 휴대전화에서 관련 증거를 확보했다. A판사의 스마트폰에서는 여성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3장 발견됐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A판사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스마트폰 사진 촬영 애플리케이션이 오작동해 나도 모르는 새 사진이 촬영됐다”고 주장하는 등 혐의를 적극 부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A판사는 학창 시절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만점을 기록했을 정도로 수재인 데다 현역 야당 중진의원의 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부족할 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고 학업성적도 좋았던 30대 초반의 젊은 판사가 몰카 범죄를 저지른 것. 게다가 그는 과거 성폭력 사건 전담 합의부에 근무한 경력이 있어 누구보다 몰카 범죄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폭력처벌법 제14조에 따르면 상대방의 동의 없이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 부위를 촬영할 경우 5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한다.

A판사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범행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한 법조계 인사는 “A판사는 성실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주변에서 평판이 좋았다. 그래서 그가 이러한(몰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분위기다. 아직도 본인도 모르게 사진이 찍혔다는 그의 말처럼 오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밝혔다. 하지만 검찰은 7월 24일 사안이 심각하다 보고 해당 사건의 수사에 착수했다.



서울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는 스마트 국민제보 애플리케이션 홍보 그림과 몰래카메라의 적극적인 신고를 권하는 그림 등을 래핑한 ‘안전계단’이 조성돼 있다.[뉴시스]
A판사 외에도 몰카 범죄를 저지른 고위 공무원은 많다. 2013년 5월에는 사법·행정·입법고시에 모두 합격한 엘리트 공무원 B씨가 서울 영등포구 한 건물 여자화장실에 숨어 휴대전화로 10대 여성이 용변 보는 장면을 몰래 찍다 경찰에 붙잡혔다. B씨는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2015년 6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형이 선고됐다. 같은 해 8월에는 진료실에서 상습적으로 환자의 신체를 몰래 촬영한 산부인과 의사 C씨가 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진료실에서만 137차례에 걸쳐 환자의 몸을 촬영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근무하던 병원 간호사의 치마 속을 휴대전화로 촬영하는 등 추가 범죄도 확인됐다.

지난해 8월에는 외교부 서기관 D씨가 버스에서 휴대전화로 여성의 치마 속 등을 촬영해 경찰에 적발됐다. 경찰 조사 결과 D씨는 2015년 4월부터 서울 시내 카페 등지에서 상습적으로 여성의 신체 일부를 몰래 촬영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범죄가 적발된 날 버스에 타기 전에도 정부서울청사 외교부 로비에서 여성의 신체 일부를 찍었을 정도로 몰카 중독이었다. 법원은 D씨에게 벌금 700만 원을 선고하고 성폭력 치료 강의 40시간 수강 명령을 내렸다.

같은 해 9월에는 헌법재판소 연구관 E씨가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자신의 휴대전화로 한 여성의 다리를 촬영하다 붙잡혔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여성의 신체 부위를 찍은 사진이 다량 저장돼 있었다.

범죄인 줄 알면서도 늘어나는 고위층 몰카 범죄

이들 외에도 공무원 등 사회 고위층의 몰카 범죄는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경찰청의 ‘카메라 이용촬영 범죄자 현황’에 따르면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몰카 범죄가 가장 빠르게 증가한 직업군은 공무원인 것으로 드러났다. 공무원 몰카 범죄자는 2012년 13명에서 지난해 46명으로 3.5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문직은 58명에서 137명으로 2.4배, 자영업은 124명에서 259명으로 2배의 증가세를 보이며 뒤를 이었다.

고위층의 몰카 범죄가 적발되면 피의자 주변 사람은 대부분 A판사의 예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경찰 관계자는 “몰카 범죄 피의자가 일상생활에서 이상 행동을 보일 정도로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주변 사람은 대부분 (피의자가) 항상 상식적인 행동 양식을 보여왔기 때문에 (범행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소위 ‘알 만한 사람’의 몰카 범죄가 계속 이어지는 이유에 대해 이윤호 동국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법조인, 의료인 등 고위직종은 사회적으로 높은 윤리의식을 요구받는다. 그만큼 성적 욕구나 충동이 억압될 여지가 있다. 그래서 일부는 억압된 충동을 몰카나 관음증 같은 성범죄 또는 성도착으로 발산하곤 한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고위직 종사자는 성범죄 혐의가 확인될 경우 자신의 평판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성범죄 가운데 처벌 강도가 낮고, 혐의를 피하기 쉬운 몰카 범죄를 택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던 여성을 촬영해 실형을 선고받은 B씨는 대법원 판결 이후 자신을 처벌한 근거인 성폭력처벌법 조항의 개념이 막연하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해당 헌법소원은 7월 9일 기각됐다.

이 교수는 “가장 큰 문제는 몰카가 범죄란 것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이 범죄가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는 잘 모른다는 점이다. 피의자도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해 범죄를 저질렀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고 변명하며 범죄 피해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촬영된 영상이 유출되면 피해자는 평생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이와 같은 몰카 범죄 피해의 심각성을 확실히 인식토록 해야만 몰카 범죄를 줄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몰카’ 범죄 처벌 기준도 명확지 않아

몰래카메라(몰카) 범죄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나 자신의 휴대전화나 소형 카메라로 상대방의 신체를 촬영하다 적발돼도 무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있다. 법상 처벌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 2015년 1월 밤 11시 서울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20대 여성 A씨는 함께 타고 있는 남성 B씨가 자신을 스마트폰으로 찍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당시에는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워 남성을 제지하지 못하다 이후 경찰에 신고했다. 폐쇄회로(CC)TV를 바탕으로 붙잡힌 B씨의 휴대전화에는 지하철 등에서 찍은 여성의 사진 200여 장이 들어 있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B씨는 2심에서 벌금 100만 원을 선고받았으나 지난해 1월 대법원은 무죄 취지로 해당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피해 여성이 검은색 레깅스와 긴 티셔츠를 입고 있어 신체의 외부 노출이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2015년 11월에는 한 남성이 공공장소에서 짧은 반바지나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을 따라다니며 몰래 촬영한 사진 58장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사진을 찍은 신체 부위에 따라 유무죄가 결정됐기 때문. 서울북부지방법원은 다리를 찍은 사진 42장은 유죄, 전신을 찍은 16장은 무죄로 판결했다.

몰카 범죄의 처벌 규정을 담고 있는 성폭력처벌법 제14조에는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 부위를 촬영할 경우’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근거로 법원은 해당 사진이 성적 욕망의 반영이나 피해자의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지를 판단해 유무죄를 결정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일부 판례를 보면 촬영한 부분이 성적 욕망과 무관하다며 무죄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킨다거나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는 등의 쟁점은 주관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크다. 따라서 해당 법을 동의 없는 촬영에 대한 처벌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10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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