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횡단보도 건너기, 러시안룰렛 같은 공포”

동아일보
동아일보2017-05-04 11:02:31
공유하기 닫기
사진=동아일보 DB
“러시안룰렛 같아요.”

찰스 헤이 주한 영국대사의 부인 파스칼 서덜랜드 씨(51)는 ‘횡단보도 건너기’를 이렇게 비유했다. 물론 영국이 아닌 한국 상황이다. 러시안룰렛은 총알 1개가 장전된 리볼버(회전식) 권총을 돌아가며 겨냥해 발사하는 걸 말한다. 이른바 ‘죽음의 승부차기’다. 서덜랜드 씨는 한국의 도로에서 러시안룰렛의 공포를 느꼈다고 털어놨다.



○ 70대 중 단 1대만 횡단보도에서 멈췄다

지난달 13일 서울 중구 주한 영국대사관저에서 서덜랜드 씨를 만났다. 그는 남편과 함께 2015년 2월 한국에 왔다. 국제회의통역사협회(AIIC) 정회원인 그는 이화여대에서 영어 통역을 가르치고 있다. 서덜랜드 씨는 최근 유명 미국 사진작가의 6·25전쟁 사진을 국내에 영구 전시하도록 이끄는 등 대외활동에 적극적이다. 그는 “평소 한국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다”며 “동아일보가 한국에서 교통안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동안 한국 생활에서 느낀 교통 문화의 문제점을 꼭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파스칼 서덜랜드 주한 영국대사 부인. 동아일보 DB
서덜랜드 씨가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는 횡단보도였다. 그는 한국에서 두 딸을 외국인학교에 보내고 있다. 서덜랜드 씨는 “애들이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널 땐 차량을 향해 멈추라는 의미로 손을 뻗는다”고 말했다. 사람이 횡단보도 앞에 서있어도 차량이 좀처럼 속도를 늦추지 않는 탓에 나온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서덜랜드 씨와 함께 관저에서 나와 근처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 갔다. 관저에서 직선거리로 250여 m 떨어진 세종로파출소 앞이다. 이곳은 왕복 3차로로 도로 폭이 9m가 채 되지 않는 좁은 이면도로의 진입로다. 파출소 양옆에는 면세점 건물과 호텔이 있고 횡단보도에서 약 85m 떨어진 곳에 지하철역도 있어 유동인구가 많다.

보행자들은 길을 건너기 전 횡단보도 앞에 서서 도로 양쪽을 살폈다. 하지만 대부분의 차량은 길을 건너려는 보행자를 보고도 속도를 별로 늦추지 않고 진입로로 ‘돌진’하다시피 했다. 한 관광객은 횡단보도에 이르기 직전 급정거하는 차를 보고 ‘위협’을 느꼈는지 몸을 움츠렸다. 횡단보도 앞에 있던 약 20분간 보행자들을 보고 먼저 멈춘 차량은 70여 대 중 1대뿐이었다.

“영국에서는 횡단보도 앞에 보행자가 서있으면 차량들이 일단 멈춥니다. 도로에서는 약자인 보행자를 항상 우선적으로 보호한다는 안전의식이 뿌리내린 것이죠. 아이들 등굣길에 같이 가곤 하는데 학교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갈 때 차량이 속도를 늦추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럴 때면 애들이 도로 가장자리에 붙어서 갑니다.”




파스칼 서덜랜드 주한 영국대사 부인. 동아일보 DB
○ “어리석은 죽음 막을 수 있다”

최근 서덜랜드 씨는 한 이화여대 제자가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며칠 전에는 한국 지인의 이웃 자녀가 사고를 당해 다친 이야기도 접했다. 그는 “보도가 없는 골목길에서 속도를 늦추지 않는 차량도 아찔하지만 곡예하듯 달리는 오토바이도 위험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택시를 탄 경험도 소개했다. 서덜랜드 씨는 한국인 지인과 함께 택시 뒷좌석에 함께 타자마자 평소 습관처럼 안전띠를 맸다. 그러자 지인은 “뭐 하러 안전띠를 매냐. 안 해도 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서덜랜드 씨는 “지나가는 말이었겠지만 한국인들이 안전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느낀 순간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2015년 기준으로 한국의 뒷좌석 안전띠 착용률은 22%에 그치고 있다. 영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의 뒷좌석 안전띠 착용률은 평균 80%가 넘는다. 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안전띠를 매지 않을 경우 맸을 때보다 치사율은 최대 12배 높다. 현재 뒷좌석 안전띠 착용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국회에 발의됐지만 아직도 계류 중이다.

서덜랜드 씨는 “영국도 처음엔 안전띠가 생활화되지 않았다”며 “1970년대부터 지속적인 안전띠 착용 캠페인 등을 통해 안전의식 변화를 이끌었기 때문에 지금의 교통안전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교통사고 사망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 것은 ‘어리석은 죽음(stupid death)’ 같아요. 교통안전은 공공재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정부의 강한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당장 변화가 생기진 않아도 정부가 꾸준히 안전 교육에 힘쓴다면 한국도 안전한 교통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 공동기획: 국민안전처 국토교통부 경찰청 교통안전공단 손해보험협회 한국교통연구원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tbs교통방송
교통문화 개선을 위한 독자 여러분의 제보와 의견을 e메일(save2000@donga.com)로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