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기업 임원 “한국선 사업보다 월급쟁이가 편해”

동아일보
에디터 동아일보|
“차라리 힘들게 기업 하지 말고 금융투자나 할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사업은 하나 벌일 때마다 관련 법규 찾느라 시간이 다 가요. 금융투자는 금융법 하나만 공부하면 되잖아요.”

식품 및 제조업 계열사를 거느린 오너 최고경영자(CEO) A 대표의 호소다. 그는 “복잡한 규제가 기업가 정신을 옭아맨다”고 토로했다. A 대표처럼 한국의 체감 규제 수준이 강하다고 느끼는 기업이 80.6%나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본보가 8월 대·중소기업 500개를 설문조사한 결과다. 점수로 따지면 10점 만점(가장 강한 상태)에 6.45점이었다.

○ 투자·고용 막는 겹겹 규제

현재 체감 규제 점수 6.45점에서 체감 규제가 1점 완화된다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 응답 기업들은 매출 및 영업이익이 늘고(42.2%), 투자 활동이 촉진되며(37.6%), 고용이 확대될 것(34.4%)이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규제 때문에 실적 향상이 어렵고, 투자와 고용이 위축된다는 것이다.

유통 규제가 그런 사례 중 하나다. 2013년 롯데쇼핑이 서울시로부터 사들인 마포구 디지털미디어시티역 인근 부지 2만644m²(약 6245평)는 5년째 공터 그대로다. 주변 상인과 주민들의 찬성에도 불구하고 인근 전통시장 상인들이 반대하면서 삽조차 뜨지 못했다.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르면 대규모 유통시설이 들어설 때 지역 상인과 상생 협약을 체결해야 한다. 롯데 측이 수도 없이 상생 협의를 했으나 절충점을 찾지 못했고, 부지를 판 서울시는 나 몰라라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계획대로라면 벌써 문을 열어 일자리 5000개를 창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정기국회에서는 복합쇼핑몰도 대형마트처럼 월 2회 의무 휴업해야 한다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이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유환익 한국경제연구원 정책본부장은 “개정안이 통과되면 일자리가 최대 3만 개 날아갈 수 있다. 실제로 골목상권을 침해하는지도 논란이고, 소비자 편익과 일자리 창출 등 여러 요인을 감안해야 하는데 표만 의식해 규제를 쏟아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 노동·고용 규제 불만 높아져
설문 응답 기업들은 앞으로 규제가 더 강해질 것으로 봤다. ‘국내 경제의 규제 수준이 향후 5년 후 어떻게 변할 것으로 예상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 기업의 65.0%가 ‘강해질 것’이라고 답했다. ‘매우 강해질 것’(3.4%)까지 합하면 기업 10곳 중 약 7곳이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는 셈이다. 제조업이 비제조업보다 ‘강해질 것’이란 응답 비율이 5.1%포인트 높았다.

설문조사를 시작한 시점(8월 13일)은 문재인 대통령이 붉은 깃발법을 언급하며 강력한 규제혁신 드라이브를 건 직후다. 그럼에도 규제가 강화될 것으로 본 가장 큰 이유는 노동 및 고용 부문 규제 강화(41.8%) 전망 때문이었다. 이어 정부 및 국회의 규제 완화 노력 미흡(27.2%), 대기업 경영활동 규제 강화(14.0%), 신사업 및 신기술에 대한 규제 신설(12.9%)이 뒤를 이었다. 규제 완화가 필요한 부문에 대한 질문에서도 ‘일자리’라고 답한 기업(43.2%)이 ‘신사업 분야’(27.4%)보다 많았다.

정부는 신사업 중심으로 규제를 풀려 하지만 상당수 기업은 노동 및 고용 부문, 재벌 개혁을 앞세운 규제로 현실적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중소기업에 최저임금, 근로시간 단축은 생존과 결부될 만큼 큰 문제라 블랙홀처럼 다른 이슈를 삼켜 버리고 있다”고 말했다.

○ “정부·국회, 현장 너무 몰라”

500개 응답 기업은 설문 곳곳에서 국회와 정부의 규제 혁신 의지에 불신을 드러냈다. 규제 혁신이 쉽지 않은 이유로는 ‘국회(53.2%)와 정부(40.6%)의 의지 부족’을, 규제 수준이 더 강해질 것으로 보는 이유 중 하나로 ‘정부 및 국회의 규제 완화 노력 미흡’(27.3%)을 지목했을 정도다.

5대 그룹 계열사의 한 대표이사는 “산업을 촉진한다는 좋은 취지로 만든 법도 세부 내용을 보면 속이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정부가 실제 기업이 돌아가는 현장 속에서 소통해야 달라진다”고 했다. 정부 인허가 사업에 투자하려다 정부 방침이 계속 바뀌어 2015년 한국에서 철수한 일본의 한 기업 임원은 “한국에선 사업하지 말고 그냥 월급쟁이로 사는 게 마음 편한 길”이라고 비판했다.

정부가 규제 하나를 풀기 위해 각종 이해집단과의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 점도 규제 완화가 어려운 이유로 꼽힌다. 이 때문에 산업계는 강력하게 ‘네거티브 규제 방식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법에 불법이라 규정된 것 외에는 허용하자는 것이다.

국회가 하루 평균 1건씩 규제 입법을 쏟아내는 것을 막으려면 국회의원을 입법 건수로 평가하는 시스템에서 규제 철폐 건수로 평가하는 새로운 잣대를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정부의 핵심 가치인 ‘혁신성장’은 규제 완화를 말하지만 ‘공정경제’는 규제를 계속 만들고 있다. 기존 산업의 투자와 고용을 늘리고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총체적 혁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현수 kimhs@donga.com·배석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