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지옥’ 로스쿨서 단련된 일부 변호사, 동료와도 기록 공유 안 해

동아일보
에디터 동아일보||2018-08-09 10:59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는 참고사진 ⓒGettyImagesBank
로스쿨 학생들은 중간·기말고사 때 시험지에 이름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무작위로 부여되는 수험번호를 문자로 전송받아 적는다. 교수의 ‘채점 특혜’ 시비를 막기 위해서다. 조교가 답안지를 앞자리부터 걷으면 “뒷자리 학생에게 몇 초를 더 줬다”는 항의가 빗발친다. 학점이 좋은 학생들은 서로 수강과목이 안 겹치도록 학기 초 평화협정을 맺기도 한다. 칼같이 적용되는 상대평가가 빚은 풍경이다.

수강 인원이 적어 절대평가가 이뤄지는 과목도 있지만 이때도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추가 신청자가 생겨 상대평가로 바뀔 위기에 처하면 ‘마지막 신청자’ 색출·토벌 작전이 전개된다. 기존 신청자들이 해당자를 단톡방(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초대해 수강을 철회할 때까지 회유하거나 협박한다.

8월은 이제 첫 학기를 마친 1학년생들이 휴학을 고민하는 시기다. 주요 로펌들이 1학년 성적 우수자를 ‘입도선매’하기 때문이다. 휴학 후 학원에서 다음 학기 예습을 하는 1학년생이 적지 않다. 휴학 요건이 출산이나 심각한 질병 등으로 제한돼 있지만 학생들은 우울증, 공황장애 소견서를 내민다. 자살 기도라도 할까 봐 학교는 거부하지 못한다.

서울대 로스쿨은 입학생 5명 중 1명꼴로 휴학한다. 첫 학기를 마친 뒤 휴학하는 학생이 가장 많다. 최근 서울대 등 주요 로스쿨이 1학년에 한해 절대평가를 도입하려는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미국 최상위급인 예일대 로스쿨은 3년 내내 학점을 매기지 않는다. 이미 검증된 학생들 간 우열을 가리는 게 무의미하다고 본다.

치열한 경쟁이 나쁜 것은 아니다. 로스쿨이 기존 사법시험 제도를 완전히 대체하게 된 만큼 내실을 갖춰야 한다. 우수 인재를 선별할 잣대도 필요하다. 하지만 사법연수원 성적으로 줄 세우던 폐해를 줄이려 도입한 로스쿨이 지금처럼 학점 노예를 양산한다면 바라던 변화는 아니다.

연세대 의대는 4년 전 본과생 대상 절대평가를 시작했다. 매 학기 과목별 기준치를 제시하고 도달 여부만 따졌다. “이를 악물고 하면 A학점 받을 학생들이 C학점 수준에 안주할 것”이란 우려가 많았다. 올해 초 졸업한 첫 ‘절대평가 세대’ 122명이 보여준 결과는 반대였다. 의사국가고시 합격률 98.6%. 이 대학 최근 5년간 합격률 중 최고치다. 합격자 120명의 평균 점수(301점)도 전체 합격자 평균(286점)보다 월등히 높다.

상대평가는 우열을 가리는 데 유용하지만 정작 학생이 요구되는 능력을 갖췄는지는 살피기 어렵다. 실력이 모두 미달이어도 1, 2등은 나오기 마련이다. 이에 비해 절대평가는 등수보다는 학생이 꼭 필요한 실력과 자질을 갖췄는지에 중점을 둔다.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는 참고사진 ⓒGettyImagesBank
경쟁적인 환경에서 더 뛰어낸 인재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미국 스포츠과학 저널(Journal of Sports Sciences) 연구를 보면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한 소도시(5만 명 이하)에서 자란 선수가 프로 리그에서 뛰는 비율이 인구 분포 대비 2배가량 높았다. 미국 인구의 25%가 소도시에 사는데 미국미식축구리그(NFL)와 미국프로골프(PGA) 선수 중 소도시 출신은 50%에 달했다. 덜 경쟁적인 여건에서 지속적인 격려를 받은 선수가 더 큰 잠재력을 갖는다는 게 연구팀의 결론이었다.

의사와 법률가는 사람의 신체적 생명과 사회적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다. 이미 바늘구멍을 통과해 고등 교육기관에 들어온 의대생과 로스쿨생을 또다시 상대평가의 틀에 욱여넣는 것은 무엇보다 의료와 법률 소비자에게 손해다. 누군가를 이기려고 불행하게 공부하며 서열의식을 내면화한 ‘반쪽 인재’에게 삶의 중요한 문제를 맡기기엔 망설여진다.

상대평가에 단련된 일부 변호사는 노트 필기와 시험 족보를 꽁꽁 숨기던 습관이 몸에 배어 같은 사건을 맡은 동료 변호사들과도 소송 기록을 잘 공유하지 않는다고 한다. 절대평가를 경험한 연세대 의대생들의 소감은 사뭇 다르다. “남을 제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내 실력으로 수술방에 설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다.” “홀로 투쟁한 4년이 아닌 동기들과 함께 성장한 4년.” 이들은 절대평가였기에 할 수 있었던 일로 ‘연구’와 ‘봉사활동’을 가장 많이 꼽았다.

우리는 큰 병에 걸리거나 인생의 고비를 맞았을 때 어떤 교육을 받은 의사와 법률가에게 의지해야 할까.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