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에 가득한 책들… “휴가지서 만난 ‘책버스’ 반갑네요”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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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오죽한옥마을로 간 ‘책 읽는 버스’
3일 강원 강릉시 오죽한옥마을을 방문한 ‘책 읽는 버스’와 버스에서 책을 빌린 휴양객들. 버스 안쪽에는 도서 약 1000권이 비치된 서가, 독서를 할 수 있는 긴 의자, 영상·음향시설이 설치돼 있다. 배지, 책갈피 만들기 체험 등 여러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강릉=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강원 강릉시 대관령7터널을 빠져나오자 동풍이 태백산맥을 오르며 남긴 안개와 구름이 차창 오른쪽으로 펼쳐졌다.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이 운영하는 이동도서관 ‘책 읽는 버스’(책버스·문화체육관광부 주최, KB국민은행 후원)를 취재하러 3일 오후 강릉 오죽한옥마을에 가는 길이었다.

책버스는 한옥마을 내 ‘휴심정(休心亭)’ 앞에 서 있었다.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오죽헌이 지척이다.

“책요? 결혼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많이 봤지요. 요즘은 일에 지쳐 뭘 읽을 시간이 없었는데, 휴가 와서 책버스를 만나니까 정말 반갑네요.”

경기 부천시에서 가족과 왔다는 한옥마을 투숙객 정해영 씨(41)는 경포해변에서 해수욕을 한 뒤 책버스에 들렀다. 정 씨의 아들 승우 군(8)은 버스에서 신나게 학습만화를 읽었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결코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한 율곡 선생. 일에 떠밀려 독서가 어려워진 오늘날을 마주한다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

버스에 타보니 ‘#.무슨 책 읽어?’라는 제목의 게시판에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다. 책버스에 올랐던 이들이 남긴 책 소개다.

“김애란의 ‘비행운’―현대인들, 특히 청춘의 삶 그 자체를 그려내고 있어요. 저는 슬퍼서 울었답니다. 엉엉” “이승희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죽고 싶을 때의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책” “클라라 마리아 바구스의 소설 ‘봄을 찾아 떠난 남자’―파랑새 같은 이야기. 나를 찾아 떠나서”…. 책버스는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서로 책을 추천하는 소통의 장이었다.

기자도 전날까지 강원도에서 휴가를 보냈다. 서울에서 챙겨온 책 몇 권은 영 잘못 골랐다 싶었던 차였다. 내부를 개조한 책버스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은 약 1000권. 무심코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민음사)을 뽑아들었다.

매미가 우렁차게 우는 가운데 시원한 버스에 앉자 책장이 절로 넘어갔다. 영국 저택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을 보낸 주인공 스티븐스는 옛 동료를 만나러 휴가를 떠난다. 거기서 집사의 직분에만 맹목적으로 충실하게 보낸 자신의 삶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다. 휴가 마지막 날 한 노인은 그에게 말한다. “우리 둘 다 피 끓는 청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문득 휴가 뒤 우리를 기다리는 일터도 스티븐스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인공의 말마따나 “언제까지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 우연히 펼쳐 든 책은 새삼 삶의 자세에 관한 고민을 얹어놓았다. 누구라도 어딘가에서 책버스를 마주칠 기회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들어가 보시길.

책버스는 명심보감과 탈무드를 비롯한 고전 포켓북도 무료로 나눠준다. 아이들을 위한 독서지도사의 동화 구연, 공연 실황이나 애니메이션 상영 등 다양한 프로그램 역시 마련돼 있다. 책버스는 평소 도서관이 없는 벽지를 주로 찾아간다. 8월 9∼12일엔 경남 통영시 한산대첩 축제 현장, 14∼19일 강릉시 연곡해변 솔향기캠핑장에서 휴양객을 기다린다.
 
강릉=조종엽 기자 jjj@donga.com